조선족 자치주 공짜로 주어진 것 아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을 중국 정부의 시혜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으로 얻어낸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3일 '자치구'로 출범했다. 그러나 1955년 4월 자치주로 격하됐다. 초대 주장(행정책임자)인 주덕해는 애초 길림성의 장백현과 흑룡강성 남부의 닝안현 까지 포함하는 '성급' 자치구를 생각했다. 현재 연변조선족 자치주 면적 4만3559㎢의 2배 정도 되는 넓이였다.

그러나 주덕해는 57년 민족정풍운동 때 자치구를 생각했다며 '지방 민족주의자'로 비판받았다. 결국 그는 문화대혁명 때 '매국노', '북조선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한 재중동포 학자는 "항일무장투쟁이 한창일 때 만주지역 공산당 간부의 90%가 조선족이었다"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웠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에 당당하게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일제 패망 뒤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만주에서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조선족은 6만2000명이다. 당시 조선족 전체 인구의 5%나 된다. 중국정부가 1921년부터 1982년까지 활동한 사람가운데 열사로 인정한 사람이 길림성에서만 3만6000명이다. 이 가운데 1만4000명이 재중동포다. 연변의 경우 전체 열사의 93.8%가 우리민족이었다.

연변지역은 1850년대까지 200여년간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거의 버려져있던 땅이다. 그러나 1860년대부터 조선 사람들이 이 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밭농사만 짓던 한족과 달리 조선족은 이 지역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벼농사의 한계선인 북위 49도선을 뛰어넘어 흑룡강성까지 이를 전파시킨 것도 한민족이었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4-10-14)

심각한 위구르족 독립운동... 중국인 테러 잇따라

티벳의 독립운동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안에서 현재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위구르인들의 독립운동이다. 티벳의 경우 달라이라마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후원세력도 많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지원세력이 없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더 극단적 방법에 의존한다. 이슬람교권이기 때문에 알 카에다 등과의 연계도 가능하다.

신쟝 지역에서만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올들어 해외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잇따랐다. 대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등 신쟝 지역과 인접한 곳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위구르 독립운동세력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지난 9일 파키스탄 남부에서 댐 건설을 하고있던 중국인 엔지니어 2명이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에 의해 납치됐다. 파키스탄 군이 14일 기습 구출작전을 벌였지만 한 명이 숨졌다.

지난 7월31일 새벽(현지 시간)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시내 '중국인 구락부'에서 폭발이 발생해 중국인 3명을 포함한 10명이 부상했다. 같은 달 27일 아프가니스탄 주재 중국 대사관 정문에는 로켓포탄이 날아들었다.

또 6월10일 아프가니스탄 북부 쿤두스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국 건설회사 현장에서 무장괴한들의 습격으로 11명이 죽었다. 지난 4월12일 이라크에서 중국인 근로자 7명이 피랍 하루만에 석방됐다.

5월3일에는 중국인 12명을 태운 버스가 파키스탄 카라치 부근 가와다르항에서 차량 폭탄 테러를 당해 엔지니어 3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쳤다.

지난 1996년 중국이 적극적으로 주도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4국가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출범시켰다.

이 조직을 만든 첫번째 이유가 바로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의 테러에 공동대처하기 위해서였다. SCO는 지난 6월17일 지역 안보 협정을 체결하고 공동 테러대책기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