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야기] "개천절 격하는 시대의 비극"

건국이 아니고 개천(開天)이다. 단군의 나라세움이 건국이 아닌 하늘 열림으로 한 민족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땅에 숱한 나라가 서고 또 사라졌다. 나라마다 그 땅과 백성을 지키겠다고 삶과 죽음을 거듭했다. 때문에 그 땅의 돌부리 하나 풀뿌리 하나에까지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향토와 고향땅에 대한 사랑이 애국심의 시작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구려의 건국을, 신라의 일어남을, 혹은 백제, 고려, 이조의 국가탄생을 우린 기념하지 않는다. 그런데 단군의 옛조선 개국을 하늘 문을 열고 이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건국일이 아닌 '개천절'로 기념한다. 숱한 나라들의 일어남이 권력의 옮겨짐에 지나지 않았지만 단군의 개국은 그 이념에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 담겨져 있다. 과거의 사건이나 유물이 의미가 부여되지 않을 땐 오늘의 우리에겐 관계가 없다. 지난날의 일들이 공간과 지속적 시간의 흐름 속에 틀이 잡혀 우리를 만들어내는 인자(因子)가 될 때 그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전통으로 삶에 영향을 끼친다.

1998년에 시작한 국조 단군상 건립운동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사회 구성원간에 뜨거운 그리고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단군이 곰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게 믿는 사람들이거나 간에 한국인의 심성 깊은 곳에 어떤 형태가 되었든 단군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1989년에서 1996년 사이에 실시한 미국의 한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84~88%가 기독교인이라고 답했다고 했다. 대통령의 취임선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한다. 헌법에 국교를 정하지 않고는 있지만 현실은 기독교 국가이다. 그런 미국의 학교에서도 인류의 시조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아담'과 '이브'로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교과서에서도 없다. 종교의 영역은 개인의 신앙양심에 맡기겠다는 정책이다.

전통과 문화는 강제될 수 없어

단군 이해에 대해서는 우리에겐 국조와 종교의 두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단군만은 종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독선일 뿐이다. 전통 속에 살아 숨쉬는 단군을 신화 속에 망령 정도로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화 전통에 대한 반항이다. 전통과 문화는 강제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대 입장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남녀 7세 부동석의 전통이 그대로 답습되고 강요될 수 없듯이 과거의 유산으로서의 전통을 현재에 맞게 재창조하는 노력 속에 역사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단군이 7천만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면 그 단군은 재평가되고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단군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 각 시대마다 새로이 인식되고 평가되면서 민족의식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그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는 한민족이 실현해야 할 이상과 정의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원초적 심상(Primordial Images)으로 우리의 문화와 정신 속에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윤리다. 윤리는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 규정이다.

홍익인간이 윤리적 모체가 되었기에 이 땅에 그 많은 외래문화가 번창할 수 있었고 토착화할 수 있었다. 대상에 대한 윤리적 배려, 이것이 바로 홍익정신이다. 여기에 좌파가 있고 우파가 있을 수 없다. 좌도 우도 아닌 중도가 있을 뿐이다.

한민족의 특성은 공동체의식이다. 공동체는 두레적 조직에 가래질적 협동과 조화다. 이런 조화와 협동의 원천이 홍익인간이다. 때문에 국학의 토대는 단군의 홍익사상일 수밖에 없다. 국론이 좌우로 갈려 나라는 망가지고 있다 이런 때 우리에겐 홍익의 중심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 살리는 길이요 이 운동이 바로 국학운동이다.

언제부터인가 개천절 행사장엔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이 참석지 않았다. 국조단군에 대한 종교적 시비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문화에 대한 모멸적 폄하 행위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해체와 같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구심점은 없고 원심력만 있는 부초의 한민족을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로 묶는 바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짓이다. '엽전의식'의 유형이다. 건전한 문화와 전통에 바탕을 두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의지를 포기한 자들이다. 이 시대의 비극은 개천절과 한글날의 실질적 격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대정신은 언제나 어떤 이상과 가치 혹은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요구한다. 그런 의지와 노력이 바탕이 될 때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다. 개천절의 평가절하는 홍익인간이라는 이상과 정의실현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능동적이며 창조적 의지와 힘이 없다는 표시다. 부조리한 현실을 개혁할 의지가 없다는 증거다.

홍익인간이 높이 중용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국학운동이다. 그렇다고 국학이 우리 문화 전통에 대한 독선적 자긍심만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국수주의로 제국주의로 흐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역사는 사가(史家)와 그가 발견한 사실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지속적 과정, 곧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라고 정의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학자와 과거에 속한 사건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말이다. 진정한 국학은, 그리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국학은 우리다움'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아름다운 과거를 오늘에 맞게 새로이 조형해내는 것이다. 옛것과 오늘의 것의 상호작용을 통해 미래적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국학운동이다.

국학은 미래를 밝히는 '등대'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국학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다움이요. 아름다운 삶의 조형이 아닐까. 그 원형이 대상을 윤리적으로 배려하는 마음의 자세인 홍익인간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곧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다. 남을 차마 해하지 못하는 마음씨다. 측은해하는 마음이다.

나의 국학운동은 25년 전 안양의 충현공원에서 들 것에 실려 온 중풍환자를 수련을 통해 고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6월 '국학원'을 개원했다. 나는 그 중풍환자와 부인의 얼굴에서 인류에 대한 희망을 느꼈다. 1년이면 걷겠냐는 것을 6개월이면 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식당을 하는 부인의 정성, 환자의 의지, 나의 마음이 합쳐 3개월 만에 그는 걸었다. 그의 걸음은 아내에 대한 엄청난 홍익이었고 그를 보고 공원엔 그 많은 사람이 모여 단전호흡 수련을 했다. 소박한 국학운동이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이 사회가 갈망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배려다. 그 환자를 고친 홍익하는 내 마음엔 좌도 우도 없었다. 그를 걷게 해주겠다는 측은지심밖에 없었다. 오늘의 이 현실을 힐링할 묘약은 단군의 홍익사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되물림(多勿)하자는게 국학운동이다. 개천절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국학운동임은 말할 것도 없다.

<一指 이승헌 / 국학원 설립자>

(뉴스메이커 2004-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