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 혼 대신 중국 옷 입혀라"

[현지취재 ③] 폐쇄적인 발굴·복원... 해외 전문가 왜 배제하나 

▲ 국내성 서벽의 모습. 밑에서부터 5개 층까지는 고구려인이 쌓은 것이고, 그 위 5개 층은 지난해 중국 정부가 복원하면서 쌓은 것이다. 육안으로 봤을 때도 솜씨 차이가 확연하다.
"2000년 전에 쌓은 성보다 요즘에 새로 쌓은 성이 훨씬 형편없다. 고구려 사람들이 만든 성벽은 지금도 바늘하나 안 들어갈 정도로 치밀한데 지난해 새로 쌓은 성벽은 돌 사이의 틈이 크게 벌어져 구멍 뚫린 것 같고…. 그래서 여기 백성들이 '어떻게 2000년 전 사람들보다 못하나'라고 웃는다."

지난 9월 14일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집안. 통구하와 인접해있는 국내성 서벽 약진교 옆에 마침 산책을 나왔던 현지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서만 60년 가까이 산 이 노인은 약진교 왼쪽 편에 있는 국내성 서벽 쪽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저기가 지난 해 성벽을 새로 쌓다가 3번이나 무너진 곳이다. 고구려 성은 원래 겉이나 안이나 돌로 되어있는데, 내부를 흙으로 채워놓고 겉만 돌을 쌓아올리는 식으로 눈가림만 했으니 자꾸 무너진 것이다. 지금 국내성 기단 부분(밑 부분)은 아예 흙에 묻혀있다. 성벽 높이를 조금이라도 낮춰야 덜 무너지니까 기단 부분을 그냥 흙으로 덮어버린것이다."

국내성 서벽을 보수하면서 그냥 흙으로 묻어버린 기단 부분은 최고 2m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집안 시민들이 정부에 대해 갖는 냉소는 보상금에도 원인이 있었다. 원래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고구려 유적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면서 보상비로 1㎡ 당 1600위안(한국 돈 23만2000원)을 내려보냈다.

이 정도면 괜찮은 보상금이었다. 그러나 집안시 정부는 1㎡ 당 600~700위안(8만7000~10만1500원)만 주고 나머지는 빼돌렸다는 것. 이 때문에 시민들이 항의시위를 하고 길림성 정부는 물론이고 중앙 정부까지 직접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 큰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2000년 전 고구려인보다 못한 복원

중국 정부는 지난 2003년부터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보수·발굴 작업을 벌였다. 물론 '고구려 역사 빼앗기' 작업의 하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방치되어 마구 훼손됐던 고구려 유적이 보수된 것은 그 동기를 떠나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난 1997년 기자가 집안에 갔을 때 고구려 유적의 보존 상태는 엉망이었다. 유적 주변마다 민가와 공장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심지어 광개토왕비는 관광객들이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보다못한 일부 한국인들은 "국내에서 모금운동이라도 벌여 고구려 유적 보존자금을 대야한다"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다른 걱정, 즉 과연 고구려 유적이 제대로 발굴되고 복원된 것인지 의문이 나오고 있다. 이전에는 유적의 훼손과 멸실을 걱정했지만 이제는 왜곡과 변조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 성은 중국 성과 구분되는 여러가지 특징이 있다. 성벽의 밑부분, 이른바 기단 부분은 퇴물림 방식을 사용한다. 퇴물림이란, 밑에서부터 조금씩 들여쌓기를 해 성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기법을 말한다. 퇴물림을 해서 일정 정도 높이가 되면 이후 수직에 가깝게 5m 이상의 성벽을 쌓아올린다.

고구려 성벽은 대부분 겉 뿐만 아니라 내부가 돌로 되어있다. 겉은 반반하고 안쪽은 옥수수 알갱이처럼 뾰족한 돌을 서로 맞물리고 여기에 소금에 찐 흙이나 자갈 등을 채워넣어 단단하게 밀착시킨다. 이에비해 중국식 성은 겉은 벽돌로 쌓고 내부는 그냥 흙으로 채워넣는다.

▲ 지난해 중국 정부가 복원한 국내성 서벽. 고구려 성다운 모습을 찾기힘들다. 마치 제방 공사를 한 듯하다.

▲ 국내성 서남쪽 끝부분에 퇴물림 쌓기를 한 기단부분이 고구려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지난해 새로 복원한 국내성의 다른 부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튼튼하게 보인다.

그러나 지난해 중국 정부가 보수한 국내성 서벽에서는 기단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수직에 가깝게 1~2m 정도 쌓았다. 그러나 원래 고구려 때 성벽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국내성 북 벽과 약진교의 오른 쪽 100m 지점에 있는 서남 쪽 끝 부분에는 여전히 기단 부분을 볼 수 있다.

새로 쌓은 성벽의 내부는 전부 흙으로 채워놓았다. 따라서 겉만 돌덩어리로 되어있을 뿐이다. 더구나 새로 만든 성벽은 이전에 고구려인이 쌓은 성벽과 비교하면 눈으로 봐서도 솜씨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요녕성 등탑시 관둔에 있는 고구려 성인 백암성의 경우 마을 사람들이 성벽의 돌을 마음대로 가져와 자기 집의 담을 쌓았다. 국내성의 복원된 성벽 모습은 관둔 마을 사람들이 담을 쌓은 수준과 비슷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교수는 성벽 문제보다는 벽화로 유명한 오회분 4호묘의 보존 관리 상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현재 이곳은 CCTV를 설치해 관광객들이 오면 내부를 보여주고 있다.

서 교수는 "원래 무덤을 공개하지 않고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이유는 강렬한 조명에 의한 벽화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 4호묘는 강렬한 조명을 사용해 CCTV로 무덤 내부를 보여주기 때문에 벽화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안으로 똑같은 실물 크기의 무덤을 만들어 공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고구려 유적보다 발해 유적 왜곡이 더 심각

▲ 중국이 만든 발해 상경성 복원도. 국내 발해 전문가들은 "이는 중국식 건물일 뿐 발해의 궁전 모습은 아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국내 발해 전문 학자들의 우려는 더 크다. 지난 9월 17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 궁전터를 찾았을 때 입구에 큰 조감도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이 조감도대로 건물을 지어 복원할 계획이다. 물론 오는 2007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것이다.

동원대 이병건 교수(건축학 전공)는 "중국 학자들이 만든 이 조감도는 발해식 건물이라고 볼 수 없다"며 "사실상 중국식 건물이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주장하는 중국이 궁전 건물까지 중국식으로 건축한다면 역사 왜곡은 더 심해질 것"라고 지적했다.

▲ 집안시 오회분을 지키고 있는 작은 송아지만한 군견. 취재 기자를 보더니 유달리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임상선 고구려연구재단 박사,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국내의 발해 전문가들은 "옛날 유적을 복원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동원돼서 정밀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며 "그러나 그런 고증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않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중국 뿐 아니라 북한이나 러시아 연해주에 발해 건물터가 많이 남아있고 당시 건물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따라서 발해 유적을 제대로 발굴·복원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일본, 러시아 등 관련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아야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들의 견해를 청취하기는 커녕 아예 발굴 현장 방문마저 봉쇄하고 있다.

국내의 한 고고학 전문가는 "고구려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으로부터 들었는데, 주춧돌 등이 나와도 그냥 묻어버리고 대충 넘어간 경우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있다"고 전했다.

중국은 집안시에도 앞으로 50억위안을 추가로 투입해 국내성 안의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유적공원화 할 계획이다. 이렇게 발굴 및 복원되는 국내성 유적공원이 원래 고구려 유적의 제 모습을 담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외국인이면 '출입금지'

지난해 12월 말 당시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등 20여명이 집안과 환인을 찾았을 때 중국 정부는 모든 유적의 관람을 불허했다. 이들은 집안 박물관이나 환인에 있는 고구려 첫 수도 홀본성은 들어가지도 못했다.

환도산성과 바로 밑의 산성하 무덤군는 차량을 타고 지나가면서 봐야 했으며, 장수왕릉과 광개토대왕비는 50여m 떨어진 곳에서 관람해야 했다. 사진 촬영도 일체 금지됐다. 또 중국 공안원들이 이들을 따라다니며 몰래 사진을 찍고 비디오 촬영을 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올 7월 1일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으로 등재가 확정될 때까지 모든 관람이 중지됐다. 언뜻 생각하면 유적의 발굴 및 복원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관광객들이 북적거릴 경우 작업에 차질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 요녕성 등탑시에 있는 고구려 백암성. 기단부분의 퇴물림 쌓기와 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본심은 이 때문이 아니다. 외국, 특히 한국을 비롯한 우리민족 전문가들이 유적 복원 및 발굴 과정을 보고 문제점을 지적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적 복원 및 발굴, 그리고 이후의 유지보수 능력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큰 지장을 받을 수 있다.

학술적 차원에서 그들 말대로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순수한 생각에서 하는 작업이라면 남·북한과 일본 러시아 전문가들의 참여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중국 안에서는 고구려와 발해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외국 전문가들의 도움은 오히려 필수적이다.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의 크라스키노, 불로치까, 체르냐치노 등의 발해유적을 한국 학자들과 공동발굴했다. 한국과 몽골학자들은 지난 1993년 다리강가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공동발굴했다. 지난 1960년대만 해도 북한과 중국 학자들은 공동으로 만주지역의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발굴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런 교류는 완전히 끊겼다.

현재 중국은 외국 학자들의 참여는 커녕 발굴 현장에 대한 관람마저 철저하게 막고있다. 심지어는 재중동포 학자들의 발굴 참여도 배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런 과정에서 집안 고구려 유적에 쓴 한글 비석에 엉터리 오자가 발생하는 등 사건까지 발생했다. (9월 20일 <오자에 맞춤법 안맞고 내용도 틀려 - 집안 고구려유적 설명 엉터리 '빈축'> 기사 참조)

중국의 고구려, 발해 유적 발굴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독단적이기까지 하다.

산성 이름도 중국식으로... 곳곳 고구려 흔적 지우기

▲ 고구려 오골성의 남문에 세워져 있는 표석. 오골성을 봉황산산성이라고 중국식으로 표기해놓았다.
북한 신의주의 맞은 편에 있는 중국의 국경 도시 단동. 이 곳에서 북쪽으로 50㎞를 가면 봉성이라는 지역이 있다. 이 곳에는 해발 836.4m의 찬운봉 등이 웅장한 산세를 자랑해 국가급 명승지로 지정된 봉황산이 있다. 여기에 바로 둘레가 무려 15.955㎞에 이르는 고구려 산성 오골성이 있다. 최대 10만명의 고구려 병사가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남문 안쪽에 있는 마을에서 40분 정도 산 중턱을 올라가면 아직도 5m 높이의 고구려 성벽이 방금 공사가 끝난 듯 튼튼하게 남아있다.

이 성은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서기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해 백암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뒤, 기세를 몰아 오골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성에서 연개소문에게 역습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갔다는 전설이다. 장대 위에는 옛날 연개소문이 앉았었다는 엉덩이 자국, 말 발자국, 소변이 흘러간 자국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성을 봉황성이라고 부른다. 오골성이라는 원래 고구려 이름은 흔적도 없다. 남문에도 '봉황산 산성'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어 이 성이 고구려인이 만든 것임을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지 중국인들은 "이 성에서 설인귀에게 연개소문이 크게 패했다"고 거꾸로된 전설을 말하고 있다.

요녕성 등탑시 서대요진 관둔에 있는 백암성도 마찬가지다. 백암성은 특히 4개의 치(雉)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어 고구려 성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아무런 설명없이 '연주성산성'이라고 쓰인 비석만 우두커니 서있다. 역시 고구려때 성벽이 잘 남아있는 곳으로 유명한 요녕성 통화 부근의 나통산성도 마찬가지다. 원래 고구려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고구려인을 패배시켰다는 당나라 장군 나통의 이름을 따서 성 이름을 지어놓았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4-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