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 美日中과 ‘깍두기’

어릴 적 고무줄놀이에 ‘깍두기’라는 게 있었다. 이쪽저쪽 양편에서 뛰는 특별 선수다. 어디 끼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정도로 잘하거나, 거꾸로 아무도 같은 편 되기를 원치 않을 만큼 별 볼일 없을 때 깍두기의 운명이 주어진다.

미국 전략문제연구소와 맨스필드재단 주최로 한중일 관계를 논하는 전문가집단 토론회에 참석한 느낌은 딱 불행한 깍두기였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과 경제대국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자꾸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었다. 특히 우리에게서 미국이라는 ‘후광’이 줄어드는 지금, 한국이 깍두기로라도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격변의 동북아 속 한국의 위상

2002년부터 같은 참가자들이 3년째 만나는 프로그램인데 분위기는 지난해와 확연히 달랐다. 경제 정치적으로 세를 얻어가는 중국 참가자들은 자신만만했고 오랜 침체에서 벗어난 일본측도 쾌활했다. 우리라고 기죽은 건 아니지만 내세울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계속하는 건 전쟁 만행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뜻이다. 고이즈미가 바뀌지 않는 한 중일 관계의 발전은 없다.”(중국)

“우리도 총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도 아시아축구경기 때 일본에 모욕을 주지 않았나. 그건 잘못된 민족주의다.”(일본)

중일 관계는 악화된 것이 역력했다. 정치인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데 속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국측이 나섰다.

“중국은 일본에는 역사왜곡을 항의하면서 왜 고구려가 중국역사라고 왜곡하나. 모순 아닌가.”

그러자 뜻밖에 양쪽에서 반응이 쏟아졌다.

“고구려 문제는 학자들의 주장이지 중국인은 알지도 못한다. 한국은 일본에 역사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면서 왜 중국에는 문제 삼나.”(중국)

“한국에서 친일과거사 규명하는 건 또 뭔가. 마녀사냥으로 한일 관계가 금갈 수도 있는데 이율배반 아닌가.”(일본)

오늘의 동아시아 정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을 연상케 한다. 인접국에 대한 불만과 경쟁심을 불태우는 화약고 같다. 앙심을 숨긴 경제교류는 ‘거품 협력’과 같아서 언제라도 터질 위험성이 있다.

중국이 경계하는 것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다. 부국강병책도 일본 견제를 위해서라고 인민일보는 강조했다. 일본은 중국시장 덕분에 경제가 살아났다고 여기면서도 중국을 잠재적 안보위협국으로 본다. 북핵에 이어 ‘남핵’까지 드러나자 일본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젊은층 사이에 부글거리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미국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에선 영향력이 줄어들었다지만 미국이 버티고 있어 두 나라의 지나친 군사경쟁을 막을 수 있었다. 겁날 게 없어 뵈는 강대국들도 외교에 신경 쓰는 건 결국 제 나라 경제를 위해서다. 상호의존을 피할 수 없는 세계화 시대, 일본과 중국은 특히 미국과의 좋은 관계가 동아시아 안정은 물론 경제라는 국익에 직접적 이득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홀로서야 할 상황이 오고 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이 설자리는 어딘지 난감해지고 있다. 동북아 경제중심? 내 나라 기업들도 힘들다고 나가는 판에 턱도 없는 소리다. 북한을 더 이상 위협으로 안 보면서부터 북한을 핵 확산의 최대 위협으로 치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어그러졌다는 지적이 파다하다. 구 소련이 사라지면서 한국의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도 예전 같지 않다. 중국과도, 일본과도 불씨를 안고 있는 상태가 됐다. 만에 하나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터질 경우 누가 우리를 도울지, 우리는 어느 편에 설지 답답해진다. 행사를 주최한 미국인 한반도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인들은 지나친 자신감에 자신의 위치를 잊었다. 지금까진 미국이 가까이 있어 한국은 실제에 비해 크게 대접받아 왔다. 이제 한국의 지도층이 세계 정세에 무지했던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 한국이 어쩔 수 없이 홀로 서야만 할 상황이 되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동아일보 2004-9-24)

[칼럼] 참 이상한 나라

뜬금없이 국민을 겁주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예를 들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목청을 높이는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우려이자 충정 때문에 그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 같은 심약한 사람으로선 덜컥 겁부터 난다.

교육… 경제… 핵… 곳곳 아우성

글을 쓰다 보면 자아도취가 되어 점점 표현 강도가 높아질 때가 있다. 그 글이 소설이거나 시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아도취가 예술적 향기를 풍길 때 그것은 명작이 된다. 그런데 객관성과 사실성을 전제로 한 저널리스트의 글은 사회적 책임을 담보로 하고 있다. 선택적으로 읽는 문학작품과 사회 현안에 대한 공론을 위한 글이 어찌 같은 성격일 수 있겠는가.

자기주장이 난무하는 무책임한 저널리즘은 ‘불안’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확산시킨다. 불안은 정신과 질환의 일종이다. 불안은 앞으로 닥칠 위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미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어 안전이 깨질 것이라는 두려운 감정을 뜻한다. 불안해지면 심장의 박동이 세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머리가 무겁고 식은땀이 난다. 아침 신문을 읽으며 그런 증세를 느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아무튼 그런 유의 글을 접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기는 정말 싫다.

불안이라는 증세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 올림픽에서 큰 성과를 올린 선수들 중에 불안체감지수가 높은 선수들이 많다고 한다. 사람마다 불안에 대한 반응수치가 다른데, 양궁이나 사격 같은 정신 집중이 필요한 선수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불안지수가 낮았지만, 레슬링이나 유도 같은 과격한 경기에서는 불안으로부터 유도되는 파격적인 에너지가 큰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다.

불안에는 개인적 불안이 있고 사회적 불안이 있다. 한국은 땅 면적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반도국가다. 말이 좋아 반도국이지 삼면이 바다고 위는 휴전선으로 막혀 있으니 섬과 다를 게 없다. 이런 특수한 상황 탓에 큰 사건이든 작은 사건이든 그 여파가 강하고 빠르다. 마치 냄비에 콩알을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화덕에 올려놓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튀어 오른다. 워낙 사회적 반응이 민감한 곳에 살다 보니 한국 사회의 불안체감지수 또한 높을 수밖에 없다.

요즘은 신문을 들춰보기가 정말 겁이 난다. 교육정책은 서로 엇갈려 아우성이고, 경제는 곤두박질을 치고,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률은 외환위기 때를 제치고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고 한다. 유가는 치솟고,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우리까지 테러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중국은 멀쩡하게 잘 있던 고구려 역사를 자기 나라 거라며 집적거리지를 않나, 핵을 둘러싼 주변 정세 또한 심상치 않다. 이런 마당에 사람들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찢어져 있고, 그 중간에 선 자들은 양비론자라며 양쪽에서 욕을 얻어먹고 있다.

불안은 불안을 파급시켜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가 온통 살얼음판 같다. 과연 우리는 그토록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 기적처럼 생존하고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위험물이 목전에 있지만, 불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불안은 상상된 위험물에 대한 반응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의 대상은 무(無)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감당하고 있는 불안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거 사이비 종교가 교세 확장을 위해 자주 써 먹던 것이 바로 종말론이었다. 몇 차례 큰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기도 했는데 결국 망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종말론을 주장하던 그 신흥종교였다. 불안은 불안을 파급시킨다. ‘이러다 망한다’는 소리가 나온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벌써 열두 번도 넘게 망했어야 할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런데 아직 건재하고 있으니 참 이상한 나라 아닌가.

<김미진 객원논설위원·소설가>

(동아일보 2004-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