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 태권도, 32년만에 한국 온다

국내 첫 ITF 대회 오는 10월 14일 대전서 열려

▲ ITF 경기 장면. 몸통이나 머리를 보호하는 호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권투글러브와 비슷한 것을 양손에 끼고 두툼한 신발을 신고 경기를 한다(경기장은 ITF가 가로세로 9m, WTF는 11m) ⓒ2004 ITF대한태권도연맹
세계 태권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국제태권도연맹(ITF/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이 고향을 떠난 지 32년 만에 귀향한다. 10월 14~19일까지 대전무역전시관에서 제7회 ITF 세계청소년태권도선수권대회와 제13회 I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열기로 한 것. 세계 50여 나라 선수와 임원진 약 1200여 명이 이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국내에서 ITF 세계태권도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ITF는 국내에서는 베일에 싸인 단체. 그러나 해외로 나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ITF는 WTF(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와 경쟁 관계이면서 세계태권도의 양대 산맥 중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두 단체의 차이점이라면 WTF가 경기에 중점을 두는 반면 ITF는 경기보다는 무도에 중점을 둔다는 것. 현재 한국 태권도는 WTF계가 중심이다.

그렇다면 왜 태권도가 두 단체로 나눠진 걸까? 그 까닭을 ITF 대한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인 오창진(37)씨에게 들어보았다.

▲ 최홍희 ITF 전 총재는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한다.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2004 ITF대한태권도연맹
"ITF는 캐나다 토론토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미국, 일본,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회원 3800만 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966년 3월 22일 최홍희(2002년 6월 평양에서 타계·향년 84세) 총재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했습니다. 이것이 태권도 역사상 최초의 세계 기구죠. ITF는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고 최홍희 전 총재는 '태권도'라는 이름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브리태니커 영문 사전에도 태권도 창시자를 '최홍희'라고 합니다.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일부 태권도인들과의 마찰로 인해 최홍희 총재는 사범 몇 명을 데리고 캐나다로 망명했습니다. 이래서 ITF 본부가 캐나다에 생기게 됩니다.

이후 1973년 5월 28일 국내에서는 WTF가 발족하게 되면서 ITF는 국내에서 이름조차 듣기 어렵게 됩니다. 군사정권은 ITF를 친북단체라고 하여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하지만 고 최홍희 전 총재는 남과 북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세계만방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신 분입니다. 무도인으로서 이념과 정치를 초월하신 거지요."


ITF는 도복도 다르고 WTF의 품세에 해당하는 '틀'도 율곡틀, 도산틀, 단군틀이라 하여 다르다. 경기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WTF가 발차기로 몸통 공격을 위주로 한다면 ITF는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할 수도 있다. 몸통 보호대나 얼굴 보호대가 없다. 양손에 글러브를 끼고 두툼한 신발을 신고 경기를 한다. WTF에 비해 ITF의 경기는 매우 격렬하다. ITF의 경기는 요즘 유행하는 이종격투기를 연상하게 된다.

▲ 1966년 최홍희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한다. 오른쪽 빨간 원내가 최홍희 전 총재 ⓒ2004 ITF대한태권도연맹
"WTF는 고대 짐승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수단으로 태권도의 막기 차기 지르기 등이 나왔으며 삼국시대에 이르러 무술 형태로 변하였고 합니다. 또, 태권도의 자세가 고구려 벽화 무용총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태권도가 '택견', '수박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현대에 이르러 태권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ITF는 태권도의 역사를 50년이라고 한다. 고 최홍희 전 총재가 가라테를 배웠지만 독자적인 고유무술로 '창헌류'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태권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ITF는 태권도라는 명칭 탄생에 대해 고 최홍희 전 총재가 1955년 4월 11일 이승만 정권 때 명칭제정위원회에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인가받았고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부터 태권도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 최홍희 ITF 전 총재는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한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최 전 총재의 입지는 극도로 악화된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당시 쿠데타 세력과의 불화 때문이다. 5·16 당시 최 전 총재는 육군소장이었으며 쿠데타 세력에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최홍희는 누구인가?


태권도와 ITF 그리고 WTF. 이 삼각관계에서 최홍희씨는 중심에 있다. 먼저 최홍희씨의 연도별 행적을 알아보자(자료- ITF 대한태권도연맹).

최홍희씨는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국 허가면 화대리에서 출생했다.

1929년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퇴학을 당하고 귀국했다가
1937년 다시 일본으로 가서 가라데를 배우게 된다.
1941년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군에 징집당해 평양 제 30보병사단에서 근무하던 중 ‘평양학병의거’로 일본군에 저항한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 8·15 광복으로 출감한 후 이듬해 1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육군창설활동을 한다.
1953년 육군 제29사단 창설하고 사단장이 되어 교관양성에 태권도(당시 명칭은 당수도)를 최초로 군대에서 교육하게 된다.
1955년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해 ‘태권도’라는 명칭을 최초로 인가받아 사용하게 된다.
1959년 19명의 사범으로 구성한 시범단을 이끌고 아시아 국가를 순회시범 한다.
1959년 9월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이 된다.
1965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고
1966년 3월 22일 지금의 ITF를 창립한다. 이후 1972년까지 당시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와 ‘당수도’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해 대한태권도협회가 대한태수도협회로 변경하는 등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낸다.
1972년 사범 몇 명을 이끌고 캐나다로 망명한다. 이렇게 해서 ITF 본부가 캐나다 토론토에 있게 된 것이다.
1974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연다. 최홍희 총재는 해외에서 태권도 보급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한다. 그의 생각은 ‘태권도는 한국에서 생겼으므로 무도정신을 잘 이해하고 교육할 사범은 한국 사람으로 한다’는 신념 때문에 교포들을 대상으로 사범양성을 하지만 인적자원의 한계를 느낀다. 이때 뜻밖에도 북한 당국에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1980년 최홍희씨는 최중화(현 ITF 총재)씨를 포함한 사범 15명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태권도 보급과 지원을 하기로 약속한다. 이때부터 ITF는 친북단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1985년 IOC위원총회 개막행사에 참석하여 WTF와 별도의 ITF 승인을 요구했다.
1986년 북한 시범단을 구성해 중국을 방문했다.
1987년 그리스에서 제5회 세계선수권대회 개최
199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원본에 태권도 창시자로 ‘최홍희’를 명기했다(Vol 11. 491p.)
2001년 ITF 기술체계 완성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타계(향년 84세)
2002년 11월 최중화를 ITF 총재로 선출(아르헨티나 정기총회)
이에 대해 WTF에서는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에 대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수도협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여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ITF와 WTF는 태권도의 출발에 대해서도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이후 WTF는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올림픽 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비록 해외로 망명하여 세계 곳곳을 떠돌긴 했으나 ITF도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한국 무도를 보급하게 된다. 그 결과 두 단체는 세계스포츠 무대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ITF는 국내에서는 친북 단체라고 하여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이념에 의한 희생이 태권도에도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 ITF 대한태권도연맹 오창진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도는 이념이나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바라봐야 합니다. ITF의 태권도를 '북한태권도'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ITF에 북한은 하나의 회원국에 불과합니다. 1980년 북한 김일성 주석이 최홍희 총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태권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그때부터 ITF는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지요.

또 최홍희 전 총재가 2002년 작고하기 전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서울에서 여생을 마감하려고 정부 당국과 협의했으나 차디차게 묵살했습니다. 결국 평양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서 영면의 길로 가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의 몇몇 관계자들이 ITF를 장악하려고 시도했으나 무산되었고 지금은 고 최홍희 전 총재의 뒤를 이어 최중화 총재가 ITF를 이끌고 있습니다."


▲ 2001년 미국 사범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 덴버에서의 마지막 세미나. 최 전 총재는 암 수술을 받은 후 링거를 꽂은 채 생의 마지막 강연을 강행한다. 여기에 참석한 사범들은 최 전 총재의 이런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2004 ITF대한태권도연맹
그러나 한반도에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에 따라 32년 만에 ITF는 고국 땅에서 대회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ITF에 대해 이념이나 단체의 기득권 문제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거구의 서양인들 틈에서 왜소한 한 유색인이 '몸뚱아리' 하나로 한민족의 문화를 세계만방에 전파했다. 또 남과 북을 둘이 아닌 한 몸으로 아우르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제는 최홍희와 ITF를 태권도의 한가족으로 바라봐야 할 때다. 10월 14일, 또 하나의 우리 태권도를 대전에서 볼 수 있다.

(오마이뉴스 / 윤형권 기자 2004-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