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중국 투쟁의 영웅 태조왕, '흉악한 침략자' 로 악평

태조(太祖)왕

재위기간 내내 요동지역 수시로 공격 漢나라서 반격나섰다 태수마저 戰死
중국人에 패배 안긴 인물 '깎아내리기' "용맹스럽고 건장" 군사능력만은 인정
6代왕 불구 개국始祖 시호가 말해주듯 영토확장등 업적 커 한국역사책선 칭송

태조왕은 고구려의 제6대왕으로 이름은 궁(宮)이었다. 궁은 업적이 탁월한 왕이었다. 일반적으로 개국(開國) 시조에게 붙여지는 ‘태조왕(太祖王)’이라는 시호를 붙인 것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왕임을 알 수 있다. 궁은 중국 사서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고구려왕이자, 중국 군현에 대해 최초로 위협적으로 공격을 해댄 왕이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왕에 대한 중국과 우리 역사서의 평가가 상반되어 있다.

▲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 남쪽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총의 벽화 중 ‘공성도(攻城圖)’. 철제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기마전을 벌이고 있다. 고구려는 뛰어난 전투력으로 중국 군현을 압박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태조왕에 대한 사서의 기록에는 이 부분이 특기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삼국사기’에는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날 때부터 남보다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고 해놓은 데 반해, ‘후한서’와 ‘삼국지’ 등의 중국 사서에는 같은 내용을 전하면서도 “그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고 적어놓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왕은 신하로부터 “어질고 밝아 내외에 이심(異心)이 없다”고 칭송받던 왕이었다. ‘삼국지’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기사도 보인다. 즉 산상왕의 아들이 그 증조부인 궁처럼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기 때문에 ’위궁(位宮)’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 말에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하는데, 궁과 닮았으므로 이름을 위궁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도 증조부처럼 장성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악평을 해놓았다.

위궁은 산상왕이 제사에 쓸 돼지가 맺어준 인연으로 주통촌의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낳은 아이, 즉 동천왕이다.

이 때문에 동천왕의 어릴 때 이름은 ‘교외에서 낳은 돼지 아이’란 뜻의 ‘교체(郊)’였다. ‘삼국사기’에는 동천왕이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었다”며 그에 관한 예까지 들어 놓았다. 그런데도 중국 사서는 그가 태조왕을 닮아 흉포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태조왕에 대한 중국 사서의 평은 왜 이렇게 험악할까? 그건 바로 태조왕이 중국 군현을 수시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태조왕은 재위 53년(105)에 한의 요동 여섯 현을 약탈했고, 가을에도 재차 공격을 퍼붓는 등 재위 후반기에 들면서부터 중국 군현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 과정에서 태조왕은 고구려의 주축인 5나부(那部)의 군사뿐 아니라 예맥·마한·선비 등 다양한 집단을 동원했다.

재위 59년(111) 3월과 66년(118) 6월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화려성을 공격했고, 재위 69년(121) 4월에는 선비족 8000명과 함께 요수현(遼 燧縣)을 쳤으며, 이 해 12월에는 마한·예맥의 1만 여 기병을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기도 했다.

재위 70년(122)에도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즉 태조왕은 한(漢) 군현과의 투쟁 과정에서 주변 종족 집단들과 정치 세력을 결집해서 이끄는 중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태조왕의 국제적인 위상을 드높였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궁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요동 태수 채풍을 죽인 사건은 중국인들에게 태조왕이 흉악한 침략자로 완전히 각인되게 한 사건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그러면서 대담하게 공격을 해대는 고구려를 응징하기 위해 태조왕 재위 69년(121) 봄에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합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략해 왔다.

이에 태조왕은 동생 수성을 보내 군사 2000여명을 거느리고 역습하게 했다. 수성은 기만 작전을 구사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즉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척 하여 풍환과 요광의 군사를 묶어두고는, 3000명의 군사를 몰래 보내 현도군과 요동군을 기습 공격해 성곽을 불사르고 2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에 놀란 요동태수 채풍이 다급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했지만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漢)으로서는 치욕스러운 패배였고 고구려로서는 대(對) 중국 투쟁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승리였다.

이것은 비록 수성이 이룩한 전승이었지만 이도 역시 최고 지배자인 태조왕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 무시무시하고 신출귀몰한 장수이자 탁월한 군사 전략가로서 그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인구에 회자되었을 것이다.

날 때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다느니, 그래서 흉악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이런 중국 사회의 분위기가 일부 역사서에 반영된 것일 터인데, 이런저런 악평을 하면서도, “장성함에 용맹스럽고 건장하였다”는 것을 빼놓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태조왕의 걸출한 군사적 능력은 완전히 공인된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왕은 대외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내정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태조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주체 세력인 다섯 개의 정치집단을 나부(那部)로 편제하여 통치하는 체제를 완비했다. 이 체제의 본격적인 가동으로 인해 체계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족 전체가 하나로 결속되어 조직적으로 대외 군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나·주나 등의 주변 소국들을 모두 통합한 다음 동옥저까지 복속시키는 등, 고구려의 영토가 압록강 중류 유역을 벗어나 동쪽으로 동해 연안의 책성(훈춘), 남쪽으로 살수(청천강)까지 이르게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에서의 왕과 계루부왕실의 위상도 높아졌으며,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도 이룩할 수 있었다. 왕의 재위 후반기인 53년(105)부터 대 중국 투쟁을 본격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내치에서 거둔 이러한 성공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숙·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조선일보 2004-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