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론의 극복

신종 ‘황화론’(黃禍論)이 유행이다. 고구려사 파동 이후 우리 사회에 중국 위협론, 중국 공포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열명 가운데 여섯명이 중국을 좋아하지 않고, 87.1% 국민이 중국의 추격에 불안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79.8%는 중국이 동반자가 아닌 경쟁자라고 보았고, 중국은 통일에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도 74.8%였다.

‘중국이 두렵다’는 인식은 냉전의 산물

원래 황화론은 유럽을 위협할 정도로 급부상하는 황인종의 동양, 특히 일본을 겨냥하여 나온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 경제가 발달하여 대국이 되면 세계적인 재난이 초래될 것이라는 중국 위협론, 중국 경계론으로 바뀌어서 서구에서, 특히 미국 보수주의 우파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곤 한다. 그런데 그 황화론, 중국 공포론이 고구려사 파동 이후 우리 사회에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빼앗아가듯이 한국 경제를 잠식할 것 같아서 공포이고, 우리를 초월할 것 같아 불안하다. 지금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중국 인식이다.

근대 이후 한국인들은 중국이 우리보다 앞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인들에게 중국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우리보다 아래에 있는 나라였다. 우리나라가 중화 체제에서 이탈하여 일본 중심으로 편입되면서 우리는 일본의 눈으로, 일본의 위치에서 중국을 보았다. 그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나라, 문명개화의 낙오자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문명화된 정도에 따라 일본 - 조선 - 중국순으로 위계 구조를 이룬다고 생각했고, 맨 아래에 있는 중국인들은 천하고 더럽다고 여겼다.

냉전 체제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 구도의 정점에 미국이 놓인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따라 미국 - 일본 - 한국 - 중국이라는 위계 구조가 생긴 것이다. 죽의 장막에 둘러싸인 ‘중공’, 홍위병과 문화대혁명의 나라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어둠의 나라였다. 요컨대 근대 이후 한국인들은 줄곧 우리가 중국보다 위에 있다고 여겨온 것이다. 그리고 수교 이후 반세기 만에 중국을 직접 만나서 우리가 위에 있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했고,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중국은 경제만이 아니라 민주화나 인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보다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중국이 비약하면서 한국이 중국보다 위에 있다는 위계 구도가 흔들리고 중국에 추월당할 것 같은 위기감이 한국인들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에 대한 인식에서 일종의 심리적 혼돈 상태에 빠지고, 황화론적 공포가 한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와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냉전 구도 속에서 생겨났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고 보면, 중국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지금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혼돈은 작게 보면 고구려사 문제 때문이지만, 크게 보면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에 형성된 한국과 중국 사이의 위계 구도가 흔들리는 데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 흔들림을 냉전 방식으로 다시 잡아매서 안정을 찾으려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다. 냉전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중국의 이미지를 부활시키는 것으로는, ‘중국은 원래 악마다’라는 본질주의적 접근법으로는 올바른 한-중 관계를 설정하는 일도 어렵고 동아시아에서 긴박하게 일어나는 탈냉전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낼 수도 없다. 최근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신종 황화론에서 중국을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은 건져내되 냉전 시대의 낡은 유산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우리는 남의 눈으로 중국을 보아왔다. 일제 시기에는 일본이, 냉전 이후에는 중국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길이 닫혀 있던 상태에서 미국이 걸러서 해석해준 중국 이미지를 우리 것으로 삼아왔고, 그런 가운데 중국과의 관계를 설정했다. 그렇게 중국을 보는 눈, 그렇게 형성된 중국과의 관계는 제국주의와 냉전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제 타인의 눈으로 본 중국을 넘어서 우리 스스로의 눈, 탈냉전 시대에 어울리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는 탈냉전 구도 속에서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길이자, 넓게는 한국이 동아시아 탈냉전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견인하는 일이다. 그 노력이 더없이 절박하다. 한반도 통일은 물론이고 우리 생존에 직결된 일이기에 그러하다.

<이욱연 / 서강대 교수 · 중국문학>

(한겨레21 2004-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