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河의 물줄기

黃河入海流 欲窮千理目 更上一層樓…. 바다로 흘러가는 황허의 물줄기를 보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당대(唐代)의 시인 왕지환(王之渙)의 시구지만,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훌륭한 격언이 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 죽이기’를 “나중에 통일한국이 간도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미리 쐐기를 박는 것” 정도로 보는 무사안일로는 중화패권의 거대한 서막을 볼 수 없으며, 이 정도로는 멀리 내다보는 자세라 할 수 없다.

한국이 군사독재에서 벗어나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한국인들의 안보 인식은 낙관론으로 흐르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은 남북 문제를 순수한 민족 문제로만 보는 중에, 안보는 노동·경제·복지 등에 밀려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높이 올라가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보면 문제점이 발견된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화해 협력’과 ‘안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에 의해 굴러갈 필요가 있다. 민족 간 화해협력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북한이 가진 ‘민족’이라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공존을 모색하는 동안, 안보를 담당한 사람들은 ‘주적’이라는 또 하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수구냉전 반통일’로 매도되는 분위기에서는, 또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 되어야 할 두 수레바퀴 간의 관계가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분칠되는 분위기에서는 미래 지향적 정책은 어려워진다. 이 문제는 좀더 높이 올라가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향후 수십년간의 세계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의 군사 우위는 쉽게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최대 도전 세력은 경제적·군사적 급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중국일 것이다. 최근 150년을 제외하면 줄곧 세계 최대의 정치 세력과 경제 세력을 구축했던 중국인들에게 있어 중화패권 의식은 낭중유추(囊中有錐·주머니에 든 송곳)와 같아서 언젠가는 뾰족한 끝을 내밀게 되어 있다. 일본도 주시의 대상이다. 지금은 미.일동맹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경제력과 기술력에 걸맞은 군사력과 정치력을 가져야만 정상적 국가가 된다”는 우익 세력의 ‘정상 국가론’은 중국의 팽창에 대비한다는 명분 또는 북핵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착착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군사적 의미가 전무한 한국의 과거 우라늄 농축실험조차 좋은 명분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세계 무대에서 미·중간 패권 경쟁이 그리고 동북아에서 중·일 간 지역 패권 경쟁이 벌어질 때 여전히 ‘새우’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생존 전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판도를 읽는다면, 한국에 있어 한.미동맹은 여전히 소중하다. 중국과 동맹을 맺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이 왜 생겨났는지를 곱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강력한 외부동맹도 가지지 못한 채 나라의 운명을 이이제이(以夷制夷)에만 내맡겼다가 국권을 유린당했던 19세기 역사를 되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북한만을 쳐다보는 자세로는 치욕스런 역사의 반복을 예방하기 어렵다. 때로는 북한의 안보 위협을 명분 삼아 내실을 키워나가야 할 필요성도 있다.

대비하지 않는 나라는 급변 사태가 일어날 경우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한국인들이 평화적 흡수통일의 단꿈에 빠지는 순간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접수해버린다면 한국은 또 다시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볼 것인가. 지금은 ‘동북공정’에 감추어진 모든 가능성들을 내다보면서 미래에 대비해야 할 때다. 만만디 중국인들이 화평굴기(和平堀起·평화스럽게 우뚝 일어난다)를 되새기며 본색을 드러낼 시기를 조절하는 동안 때로는 그들과 화친하면서, 때로는 그들을 견제하면서 상호 의존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중국에 대한 기술 우위는 유지되어야 하며, 국력 신장은 멈출 수 없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믿고 싶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은 북한만을 쳐다보며 일희일비하는 단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 것으로 믿고 싶다. 온 세상을 놀라게 했던 ‘붉은 악마’들의 열정에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냉철함이 가세될 때면, 대한민국은 과거 지향적·정체 지향적 이상주의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또 한번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을 재개할 것이다.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유순하게 구비쳐 흐르는 황허의 물줄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라.

<김태우 /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국민일보 2004-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