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후진타오 시대] 중화민족주의와 대외관계

중국에서는 최근 ‘중화민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관영 언론매체는 물론 정치 지도자들도 이 말을 쓴다.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지난달 23일 ‘덩샤오핑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제목의 긴 글을 실었다.

인민일보는 이 글에서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후 100년 만에 중화민족은 천지를 뒤엎는 변화를 만들어 내며 위대한 부흥을 일궈내고 있다”고 밝혔다.

중화민족이라는 말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들어선 후 사용빈도가 부쩍 늘었다.

중국에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해 새로운 민족주의 개념인 ‘중화민족주의’가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공산주의혁명 마지막 세대인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물러나고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 출신의 제4세대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변화다. 이 같은 현상을 놓고 보면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가 사회주의 이념만으로 통치하기에는 너무 다양해지면서 지도이념의 변화를 낳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정치적으로는 소수민족 문제를 흡수·통합할 수 있는 신민족주의·신국가주의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경제발전과 맞물려 패권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후 주석이 당·정·군을 장악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은 대외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 중 하나는 역시 대(對) 한반도 관계다. 고구려사 왜곡문제는 중국 대외정책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다. 고구려사 왜곡문제가 의외로 커지자 한국과 중국은 5개 항에 걸쳐 구두양해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중국으로서는 소수민족을 통합·유지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는 만큼 ‘고구려가 한국의 뿌리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을 쉽게 굽힐 것 같지 않다. 후 주석 체제가 들어선 후 고구려사 왜곡은 오히려 강화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문제는 확대되는 한·중관계를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다.

북한과 중국 관계에도 변화가 일 것으로 보인다. 후 주석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물려받은 후 축전을 보낸 외국 원수는 한두명이 아니다. 그러나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등 중국 언론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축전 내용을 유독 비중있게 다뤘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후 주석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혁명 마지막 세대인 장 전 주석이 물러나더라도 북·중 관계에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중국 인민일보는 북한 창건일 56주년인 지난 9일 북한의 경제개혁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양국을 연결하는 끈이 그만큼 가늘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대만에 대한 압박은 전례없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후 주석과 장 전 주석은 지난 20일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서 한결같이 군사투쟁의 준비 강화를 강조했다.

중앙군사위원회에 차오칭천(喬淸晨) 공군사령원과 장딩파(張定發) 해군사령원, 징즈위안(靖志遠) 2포사령원 3명을 위원으로 영입한 것도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다. 후 주석이 군부를 통솔하기 위해서라도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군부의 대만에 대한 강경입장을 전폭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대만해협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일본에 대한 대결구도는 전보다 더욱 표면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후 주석이 장 전 주석을 뛰어넘어 새로운 카리스마를 구축하자면 미·일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대외전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로 요약된다. 그러나 후 주석은 도광양회를 대신해 ‘화평굴기’(和平堀起·평화롭게 우뚝 일어선다)’라는 말을 즐겨 써왔다. 중국도 ‘굽히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세계일보 / 강호원 특파원 2004-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