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은 변하고 있는데…

내년이면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지 60년이 된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도 60년이 된다. 분단시대가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 나이쯤 되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는 통찰력을 가질 만도 하다. 그 통찰력은 분명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는 것이리라.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아직 그러한 통찰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힘있던 이들이나 현재 힘있는 이들, 그리고 미래의 주인공 가릴 것 없이 모두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사실화(事實畵)를 그렸다고 저마다 주장한다. 하기야 북한 어느 곳에 드리워진 구름을 보고 놀랐으니 그렇게 탓할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모두 나라를 위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정말 그런지 알 수 없다. 세계 제1위의 인터넷 국가임을 자랑하면서, 또 때때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우리는 국제정세의 흐름은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요충지라고 말하면서, 그 주변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과 기회를 주시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

바로 100년 전쯤 우리는 국제정세 변화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함으로써, 나라 잃는 설움을 겪었다. 해방 공간에서도 나뉘어 싸움으로써, 분단되어 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 탓을 하지만 결국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여전한 상태에서, 중국에 고구려역사를 절취당하고 있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현실에서 그 존재의 의미조차도 사라진다.

지금이라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보자. 국제정치현실은 도덕과 이상이 지배하기보다는 자국의 이익과 안위와 발전이 최우선으로 중시된다.

현재 세계 안보와 정치경제 질서를 주도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여러 나라가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미국의 주도권에 대한 견제도 있다. 그러나 세계가 모두 워싱턴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 현실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조기 쇠락을 예측하는 전문가는 드물다. 다른 강대국들이 미국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미국에 북한은 반(反)확산정책의 명분을 주기도 하지만, 중국 견제에 활용하는 카드다. 소용이 다하면 버릴 수 있다. 한국 또한 과거의 혈맹은 아니다.

중화(中華)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중국의 야심은 특히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총량에서 이미 세계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2020년까지 1인당 GNP기준으로 중진국이 되려는 국가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목표달성을 위해선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북한은 점차 귀찮은 존재가 되고 있다. 다만, 북한에서의 돌발사태 발생을 원치 않으며 동시에 한국 주도의 상황 전개도 바라지 않는다.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 작업 저변에는, 북한지역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영속시키고 미래의 동북아 국제질서에 대비하는 전략적 동기가 숨어있다.

일본은 경제침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발전의 동력을 가동하면서, 국제정치무대에서 안보 역할을 더욱 신장시키고 있다. 강화된 미·일 동맹으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본격적으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일본의 군사력 확대에 유리한 동기를 부여할 뿐이다. 러시아도 국내경제의 활성화와 민족 열기의 고조, 그리고 푸틴의 리더십으로 국제무대에서 옛 소련의 영화를 되찾으려 한다. 일본과 에너지협력을 진전시키고 있으며,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3개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1개의 상임이사국 후보가 우리의 주변국들이다. 이들이 모두 날고 있는데, 우리는 날려는 자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는 못하면서, 우리는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싸움에 빠져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다 우리 편이 아닌가. 주한독일대사의 말대로 국제사회에서 외톨이가 되고 싶은가.

<박영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서울신문 2004-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