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혐오엔 보수·진보 따로 없다?

[해외리포트] 미국의 위험한 대북인식 어디에서 오나 

▲ 미국중앙정보부(CIA)의 북한정보 웹사이트. 미국인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단편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에 기초해 있다.
ⓒ2004 CIA
"무엇보다 한국의 상황은 외교정책을 선악의 구도로 환원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잘 드러내 준다. 부시가 북한과 이라크, 그리고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해서 화제가 되었듯, 한 나라를 '악'이라고 불러놓은 상태에서 그들과 어떻게 협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데이비드 이그네이셔스, <워싱턴포스트> 2003. 1. 7.

미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무시할 수 없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러 모로 계몽이 필요한 사회다. 수염 기르고 터번을 두른 사람은 일단 테러리스트로 간주하는 무모함이나, 기독교와 그 이외의 종교를 '문명'과 '반문명'으로 도식화하는 단순함, 그리고 미국의 이념적 노선을 따르지 않는 국가를 '악'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그렇다.

미국에 대한 테러를 '폭력과 증오의 세력이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에 반발해 일으키는 도발'로 보거나,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반미감정을 '미국의 번영을 배아파 하는 자들의 질투'로 해석하는 부시 행정부의 '명쾌한' 사고체계는 잘 알려져 있는 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미국내의 모든 정치세력과 대중이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유사한 편견과 적대감을 공유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 비록 '악마'에서 '정신 나간 놈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집단'으로 보는 데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멀게는 북한이 미국과 이념적으로 다른 출발을 했고 또 미국과 직접 총을 겨누며 싸웠다는 사실에서부터, 가깝게는 이 나라가 번번이 미국의 권위에 도전해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가장 증오하도록 만든 것은 이데올로기적 차이나 과거의 불행한 역사보다는 현재 미국의 이해관계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미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존슨의 교수의 저서.
ⓒ2004 Henry Holt
이는 쿠바, 이란, 이라크 등 한 때 미국과 친밀한 과거를 누리던 나라들이 미국의 노선에 도전하기 시작하며 '악의 제국'으로 전락한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이 단순한 감정 차원만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정치학과 학과장을 지낸 동아시아 전문가 채머즈 존슨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퉁명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곳에 평화가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이 '악마'가 아닌 이상, 평화보다 전쟁을 즐거워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에 평화가 오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미국의 진보저널 <프로그레시브>는 한반도의 평화가 미사일 방어체제(MD) 등의 구실을 제거함으로써 미 국방성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바로 이 점이 미국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가 미국의 계획을 수포로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북한은 미국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존재였다. 그것은 북한이 터무니 없는 미국의 국방예산을 합리화하는 '위협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아주 작고 가난하며 기술적으로 낙후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위협적인 세력인 것처럼 과장되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교활했는지 이 약소국 하나를 변명으로 미국방성은 지난 15년간 전국미사일 방어체제에 투입된 추가예산 600억불을 수월하게 합리화할 수 있었다." – 빌 메슬러, "왜 미국방성은 한국의 평화를 혐오하는가" <프로그레시브> 2000년 9월호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발간된 미국 주간지 <타임>의 미국판 표지. 정상회담 대신 '리얼리티쇼'를 표지기사로 실은 데서 드러나듯, 미국사회는 다른 나라와 달리 남북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04 TIME
메슬러에 따르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미행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회담을 승인하지도 않았고 또 달가워 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국이 체계적으로 건설해 온 북한의 '악당'으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였다는 것이다. 비록 의례적인 축전을 마지 못해 보내기는 했지만, 전 세계가 그 경이로운 사건에 대해서 환호할 때 미행정부는 속을 태우고 있었다고 메슬러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메슬러의 주장이 옳다면, '악의 축'으로서의 북한의 역할은 미국방성이 원하는 일인 동시에 미국이 체계적으로 구축한 이미지 전략의 결과인 셈이다. 이러한 '악당 만들기' 작업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북한이 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협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이라크보다 북한을 쳤어야 한다'는 주장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 북한혐오

올해 초 우연히 미국 진보지식인들의 워크숍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국제정치부터 문화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실질적이고 유익한 행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한 행사에 참여했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

미디어에 의해서 전달되는 광고이미지의 문제점을 다루는 시간이었는데, 발표자는 여러 면에서 탁월한 분석력을 보여주었다. 미국광고에서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성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성차별적 보수성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분석이었다. '유머광고'의 웃음 뒤에 교묘하게 자리잡은 여성에 대한 폭력성을 날카롭게 지적한 그 남성학자는 다음과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여기가 북한입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발표자가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발표자의 통찰력을 빌어 그 웃음 뒤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인들의 대북인식을 어렴풋이 그려낼 수 있었다.

대중의 웃음은 늘 상식에 기초하는 법이다. 나는 그 발표자나 참석자들이 북한의 여권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이 북한에 대해서 알고 있던 바는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식량부족과 탈북자 문제,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았던 미사일 발사실험과 우라늄 농축 의혹, 그리고 재개봉관에서 보았던 제임스 본드 영화 정도였을 것이다.

맥락에 맞지 않게 터져 나온 '여기가 북한이냐'는 농담에 강의실을 채운 참석자들이 웃음으로 화답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지극히 상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경험의 공감대가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적어도 이들은 '조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국의 정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덮어두지 않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불행히도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상식을 넘어서는 진보성을 갖춘 미국인들은 많지 않다. 이는 한국 문제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학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을 언급할 때 미국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어휘 가운데 하나는 '사이코'로, 그 단어를 말한 후 그들은 내게 동의를 구하는 미소를 지어보이곤 한다.

적어도 보수 정치인들과는 달리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합리적인 대화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에는 미국인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상대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정신병자'로 볼 때, 그리고 그 '환자'가 위험하다고 간주할 때 해결책은 단 하나, 그들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 뿐이다. 미국인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상식적' 태도에 담긴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상식세계로 입성한 악역배우, 북한

▲ 북한을 미국의 '사실적 위협'으로 그려낸 대중영화 <007: 다이 어나더데이>.
ⓒ2004 MGM
몇 년 전, 북한을 적으로 삼은 액션영화 <007: 다이 어나더데이>가 개봉되었을 때, 한국 관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한반도를 전쟁의 무대로 삼았다는 데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한을 '동남아 같은 후진국으로 묘사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물론 각 나라의 문화적 존엄성을 무시하고 조야한 경제논리로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분하는 이런 '후진국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을 이 영화를 전혀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 그 영화가 충분한 오락을 제공할 만한 '좋은 영화'였냐는 것이었다. 우선 관객들은 북한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영화적 전제가 전혀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무자비하게 고문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의 서두 역시 '북한체제의 냉혹함'을 생각할 때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 미국인의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시카고 선-타임즈>의 영화평론가 이버트는 북한정부의 고문장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영화는 아주 독특한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이 허구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존재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제 나치와 같이 아주 사실적인 악역으로 부상했다." – 로저 이버트, <시카고 선-타임즈> 2002. 11. 22.

영화가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인과론이나, 할리우드가 국방성 및 그 배후의 군산복합체와 결탁해 전쟁의 시나리오를 짠다는 음모설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 미국 사회에서 '북한의 위협'은 아주 그럴 듯한 '상식'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중영화가 한 사회의 상식에 기초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할리우드에서의 북한 등장은 적지 않은 시사점을 갖는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개연성은 장르를 막론하고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미국의 적'으로 피지나 부탄이 등장하는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다음 달 10월이면 미국에서 새로운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팀 아메리카: 세계경찰>이라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사우스파크>의 트레이 파커 제작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우스파크>는 인종주의에서 성적 강박까지 미국사회의 전반적 모순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미국 내 보수주의자를 분노케 했던 <사우스파크>는 여러 면에서 '진보적인' 영화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는 가장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과 가장 극우적인 보수주의자들을 타협시킬만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이라크의 후세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 미국에서 10월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팀 아메리카: 세계의 경찰>의 한 장면. 북한을 '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04 Paramount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을 조롱하는 미국의 새 영화 <팀 아메리카>는 또 다시 미국 내 보수세력을 불편하게 하겠지만, 모든 면에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부시가 말한 '악의 축', 그 중에서 특히 북한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기회를 갖게 해 줄지 모르나, 북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자극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진보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보수적인 영화로 기능할 것이다.

스스로의 목을 죄는 한국의 북한 혐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강대국인 미국 앞에서 우리는 그냥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미국의 위험한 대북인식은 바꿀 수 없는 그 '운명' 가운데 하나일 뿐일까?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 '운명'의 상당부분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가꾸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국의 정보체계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미국의 정부와 언론에 대해서 갖는 태도는 흔히 이런 것이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왜곡된 한국 관련 정보와 미국언론의 흔한 오보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북한에 대한 이해에서 상당 부분을 남한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최근 가장 첨예한 이슈로 부상한 북한의 인권문제다. 다음은 미국언론에서 보도된 북한의 주민학대에 관한 보도 가운데 하나다.

"북한의 핵무기 계획에 관한 논란이 한창인 현재, 기억해 둘 만한 또 다른 사항은 북한이 자국 국민을 잔혹하게 학대하는데 사용하는 재래식 방법이다. 현재 이십 만 명의 정치범이 수용소에 갇혀 고통 받고 있다. 이들은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데, 이들에게는 오히려 이때가 이데올로기 주입을 위한 세뇌교육으로부터 해방되는 휴식시간이다." – 사설, <뉴욕 선>, 2003. 1. 3.

참으로 끔찍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위의 <뉴욕 선>의 사설은 북한 정부의 비인간적 만행을 소상하게 묘사한 뒤, '이로서 북한체제의 잔혹성이 드러났다'고 결론을 내리며 미국정부에게 북한에 대한 더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신문은 북한의 주민학대에 관한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을까? 위 사설은 정보의 출처를 아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앞의 사실은 훌륭한 영문사이트(http://english.chosun.com)를 가지고 있는 남한 일간지 <조선일보>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1987년에는 함경도 온성군에 위치한 수용소 12호에서 5천 명 이상이 학살되기도 했다. 현재 그 수용소는 폐쇄된 상태다. 남한으로 귀순한 안명조와 문현일은 그 만행을 지난 달 <조선일보>측에 알려왔다. 귀순자들에 따르면, 당시 학살은 석탄광부로 일하던 정치범이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경비병들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이 시위에 가담했다. 당시 12호 수용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과 더불어 '주위의 수용소에 있던 다른 경비대가 무장한 채 도착해 수용소를 포위한 상태에서 수감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해 가담자 5천 명을 모두 사살했다'고 <조선일보>는 밝히고 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시위가 진압 된 후 사살된 시체는 불에 태워지거나 인근의 야산에 무더기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쇳물 고문사건' 등에서 보듯, 탈북자들의 진술은 다른 탈북자들에 의해서 그 신빙성을 의심 받기도 한다. 그러나 보도원의 성향이나 보도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미국의 언론은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 보도는 미국의 대중들과 정치인들에게 고착화된 북한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더욱 두려운 것은, 메슬러의 지적대로 미행정부는 남한으로부터 제공되는 이 '외신'을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언론이 북한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특정언론에 전적으로 의존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북한의 악행에 대해서 침묵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북한에 대해서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다양한 정보가 흐르도록 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악의 결정체'로 보는 시각을 버리지 않고는 그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 그 자체'에서 어떻게 악 이외의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갖는 감정의 앙금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직 비극의 상처와 눈물을 지니고 사는 피해자들이 '객관성'이라는 관용을 베풀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혐오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분노로 가리워진 눈을 여는 것만이 또 다른 상처와 눈물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 증폭된 분노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그 '증오의 대상'을 새롭게 바라 볼 기회를 얻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정부와 '훌륭한 영문사이트를 운영하는' 일부 언론사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혐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혐오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오마이뉴스 / 강인규 기자 2004-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