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국의 숨결을 복원했죠"

디지털 문화재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
"당시 생활상 재현 통해 동북공정 맞설터"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안시성 전투를 3차원 가상현실로 복원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역사가의 무기는 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상미디어를 동원해야지요. 중국의 고구려사 찬탈에 대해 아무리 말로 맞서 보았자 별 효과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전쟁과 문화, 생활상을 한 편의 입체영상으로 재현해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도 하고 인터넷에도 올린다면 전세계에 ‘아, 이게 고대 한국이로구나!’하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후원자도 구하고 자료조사도 하고 해서 한 5년 정도 걸릴 것으로 봅니다. 정부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요즘 디지털 문화재 복원 전문가 박진호(32ㆍ서울예술대학 ATEC연구소 연구원)씨는 21일 기자에게 이런 포부를 털어놓았다. 숱한 전문용어 사이로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힘이 넘쳤고 꿈이 담겨 있었다.

디지털 문화재 복원은 세계적으로 아직 미개척 분야라 국내에서도 박씨와 전주대 영상예술학부 박소연 교수 2명 정도가 전문가로 꼽힌다.

박씨가 이 분야에 뛰어든 것은 고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배우면서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면 그뿐이고 유물은 죽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유물이 살아 있던 당시의 생생한 숨결을 느껴보고 싶었지요.” 그래서 대학에서 공부하는 10년 동안 컴퓨터 공부에도 매달렸다. 고대 문화재나 유적을 영상으로 복원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그의 작업이 처음 빛을 본 것은 2000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에서였다. 통일신라 수도 서라벌 시내를 가상현실로 되살려냈다. 관람객들은 특수안경을 쓰고 사이버 공간을 거닐면서 곳곳을 둘러 보게 된다. 가는 곳마다 첨성대 안압지 황룡사 분황사 월정교 등이 자태를 뽐낸다. “당시 영상관을 관람한 왕소보 베이징대 교수는 ‘중국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1,300년 전 변방에 이렇게 화려한 대도시가 있었다는 게 놀랍다’고 하더군요.”

복원의 기초는 고고ㆍ미술사학적 자료다. 이게 없으면 복원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박씨의 작업에는 그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연구업적과 조언이 주춧돌이 된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상상만으로 그려넣을 수는 없지요.”

2001년 초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세계적 문화유산 바미얀 석불을 폭파했을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다녀와 석불의 모습을 최초로 디지털로 복원하기도 했다. “혜초 스님 같은 우리 조상들이 참배했던 곳이라 더 애착이 갔습니다.”

박씨는 요즘 5세기 고구려 때 대동강 목교를 복원하고 있다. “중국에 100㎙ 넘는 다리가 없던 시절 375㎙짜리 다리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구려 토목기술의 수준을 알 수 있지요.” 열변을 토하는 그는 깨어 있는 고구려사 지킴이였다.

(한국일보 / 박석원 기자 2004-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