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학자 발표 자청해 중국 비판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 일대에 분포된 고인돌 유적, 돌을 이용한 성 축조, 적석총 무덤, 온돌 문화는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우리 민족의 독특한 전통입니다.

”남북한과 일본 등 동북 아시아 고대사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구려 문화에 대해 토론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국제학술회의에서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북한학자가 2명이나 참석해 해외 학자들 앞에서 중국의 역사왜곡을 강도 높게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고대 일본과 고구려 문화’를 주제로 19일 후쿠오카 국제홀에서 열린 4개국 국제학술회의는 전체 400석을 꽉 채우며 다소 흥분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일본의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회의는 고구려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규슈(九州)국립박물관 건립 준비실 등이 개관 준비 행사의 하나로 마련했다.

고구려 유적 세계유산 등재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일본의 유네스코 친선대사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한일문화교류회 위원장은 기조 강연에서 “고구려 유적은 인류 공유의 재산”이라며 “벽화고분 보존을 위해 북한이 국제적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마치다 아키라(町田章) 나라(奈良)문화재연구소장, 북한의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희승 실장, 허종호 조선역사학회 위원장,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 등이 고구려 유적에 관한 최근 조사 성과 등을 발표했다.

중국에서는 진쉬둥(金旭東) 지린(吉林)성 문물고고연구소장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오지 않고 논문만 보냈다.

특히 토론자로 참석한 북한의 허 위원장이 예정에 없던 발표를 자청하고 나서 주최측이 당황하기도 했다.

결국 허 위원장은 ‘중세 동아시아의 고구려의 역사적 지위’를, 조 실장은 ‘최근 새로 조사된 고구려 벽화고분’을 발표했다.

북한 학자들이 이례적으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40여 분 동안 장내는 숨소리까지 멈춘 듯했다.

북한 학자들은 한민족사 형성의 중심인 고구려의 민족 정신이 고려, 조선으로 면면히 이어졌으며 고구려 문화는 만리장성이나 중국의 무덤양식, 가옥구조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독특한 한민족의 문화 전통을 이룩했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북한 학자들의 비판 강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주최측이 장내 발표만 하고 발표문을 배포하지 말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니시타니 교수가 대신 소개한 중국의 진 소장 논문은 오녀산성, 국내성 일대의 최근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고구려 초ㆍ중기까지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한 내용이었다.

필자는 아차산에서 발굴된 15곳의 고구려 유적과 수천 점의 고구려 유물 중 일부를 슬라이드를 통해 소개했다.

한국에서 그처럼 중요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사실에 참가자들은 적지않게 놀라는 분위기였다.

북한의 허 위원장은 남한에서 고구려 유물이 이만치 발굴된 줄 몰랐다며 민족정신의 중추인 고구려 유적ㆍ유물을 남북 공동으로 조사해 보존하자고 제안했다.

니시타니 교수도 이 자료들이 고구려 연구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앞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가능하도록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참석자들은 2시간여 이어진 종합 토론에서 동아시아 고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고구려사를 어느 한 나라가 비뚤어진 시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며 올바른 역사를 확립하기 위해 남북한과 중국, 일본 학자가 협력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동북아 주요국의 고대사 학자들이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놓고 허물 없이 토론한 것은 물론, 중국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남북한은 물론 일본도 힘을 모으기로 합의한 뜻 깊은 자리였다.

<임효재 서울대 교수ㆍ세계고고학회 동아시아 대표>

(한국일보 2004-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