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들 "中 급격하게 달라지진 않을 것"

외교·경제선 미묘한 변화 예상

장쩌민(江澤民)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사임이 공식 발표된 19일 미국 CNN방송과 일본 NHK방송 등 주요 외신들은 이를 긴급 뉴스로 타전했다. 일부 외신은 ‘중국 사상 첫 무혈 권력이양’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지만, 향후 중국 정국의 변화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렸다.

미국 AP통신은 장 주석의 사임이 “1949년 공산당 집권 이래 첫 평화적 권력교체를 마무리짓는 것”이라면서도, “그의 사임은 또한 중국 정치에서 잘 알려진 정치적 전술, 즉 자신에 대한 대중의 공개 지지를 동원하고 지지자들로 하여금 그의 유임을 요구하도록 하는 방식을 구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전했다.

영국 BBC방송은 “그의 사임으로 급작스런 방향 전환이 예상되지는 않지만 후임자와의 차이로 인해 외교·경제 정책에 있어서 미묘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고위 정책결정기구에는 여전히 장 주석의 측근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로이터통신도 “당장 큰 변화는 없겠지만 보다 평화지향적이고 경제를 중시하는 쪽으로 정책중심이 서서히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 교도 통신은 장쩌민이 군사위 주석 사임에 이어 내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은퇴할 것이 확실하다면서도, 장 전 주석이 군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어 은퇴 후에도 덩샤오핑(鄧小平)의 경우처럼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내다봤다.

프랑스 AFP통신은 장 전 주석의 사임이 중국의 정치권력 안정화에 도움을 주겠지만 정치투쟁이나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을 끝낼 것 같지는 않다고 분석했다.

(조선일보 / 전병근 기자 2004-9-20) 

후진타오는 ‘지킬 앤 하이드’

강경하지만 동시에 개혁적

올해 61세의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뒤를 이어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PCC) 총서기 직을 거쳐 2003년 3월 국가주석직에 올랐다. 9월 19일 78세의 장쩌민 전 중앙군사위 주석의 전격사임으로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맡으면서 총 3개 직책에서 최고책임자로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중국공산지도자 제 4세대의 후는 당을 현대화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큰 목표로 삼고 있다.

해외는 아직은 베일에 싸인 중국정부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후진타오의 차후 정책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그는 ‘지킬앤하이드’의 두 인물과 같은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피눈물도 없이 강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개혁적 인물이다”라고 홍콩 링난대의 폴 해리스 정치학자는 말했다.

그의 출생지는 자서전마다 조금씩 다르나 공식적으로는 중국 동부의 안휘성 지씨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그가 상하이, 혹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부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후진타오는 1959년∼1964년 북경 칭화대학교에서 수력관련 기술자가 되기위한 과정을 밟았다. 칭화대는 중국정치지도자들의 가장큰 양성소다.

그는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인 리유용칭을 만났다. 현재 둘사이에 아들 딸 하나 씩을 두고있다. 1964년 친화대에서 고위직을 맡고있었으나 1966년 문화혁명 초기시절 사임했다.

그 후 1968년부터 북서부의 간쑤성으로 보내져 댐건설 기술자로 근무하다 지방건설위원회 비서직을 맡는다.

1982년 전국청년공산연맹에서 활동하고 43세에 간쑤성에서 지방에서 가장 젊은 당서기가된다. 1988년 말 후는 티벳 당서기를 맡았으며 1989년 3월에 있은 티벳 독립시위에 강경히 대응했다.

이로써 그는 후요방 총서기가 시작한 10년간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2년 핵심권부인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이는 덩샤오핑의 결정으로 이뤄진 것으로 덩은 당시 “좋은 동지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덩의 이런 결정에 대해 많은 루머가 떠돌았으나 그중 하나는 그가 사업을 시작한 덩샤오핑의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97년 덩의 죽음도 그의 승승장구를 막지 못했다.

장쩌민의 추종자가 많은 공산당 내에서 장의 사임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장쩌민은 결국 PCC 중앙위의 압력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앙위 다수의원들은 장의 사임을 통해 후진타오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래왔다.

한편 공산당 정보통에 따르면 전립선암에 시달리고 있는 장쩌민의 건강문제는 이번 결정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공산당과 중앙군사위의 압력으로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장-피에르 까베스탕 중국 전문가는 설명했다.

(내일신문 / 이지혜 리포터 2004-9-20) 

후진타오 인맥 ‘칭화방’ 시대 오나

장쩌민 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전격 퇴진으로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정치적 인맥인 ‘칭화방(淸華幇)’이 새로운 권력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직까진 장 전 주석이 이끌던 ‘상하이방’이 당·정·군의 핵심 요직에 폭넓게 포진해 있어 칭화방의 영향력은 상하이방에 비해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장 전 주석이 현직에서 물러난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후 주석의 입지가 공고해질 가능성이 커 칭화대 출신 엘리트 모임인 칭화방은 더욱 세력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후 주석의 전권 장악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칭화방 인사는 우관정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자춘왕 최고인민검찰원장,왕슈청 수리부장, 톈청핑 산시성 당서기, 천칭타이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부주임 등이 있다. 후 주석 대학 1년 선배인 자 검찰원장은 후 주석과 ‘공산주의청년단’ 활동을 같이 했고 왕슈청과 톈청핑은 후 주석의 대학 동기이자 공산당 입당 동지이다.

지금의 칭화방이 있기까지는 장난샹 전 칭화대 총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52∼66년 총장직을 맡으면서 ‘정치지도원제도’를 신설, 권력 네트워크를 형성시키는 데 일조했고 이는 차관급 이상 동문만 300여명을 배출하는 원동력이 됐다.

후 주석 역시 정치지도원을 거쳐 지난 1992년 열린 제14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7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상하이방 틈새에서 칭화대의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후 주석이 서기를 지낸 ‘공산주의청년단’ 출신도 핵심 인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국무원의 장푸썬 사법부장과 순자쩡 문화부장, 왕자오궈 전인대 부위원장, 류윈산 당 선전부장,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 왕러취엔 신장자치구 서기,리커치앙 허난성 성장, 쑹더푸 푸젠성 서기, 치엔윈루 구이저우성 서기 등이 대표적이다.

후 주석의 후원자였던 전 정치국 상무위원 숭핑의 근거지이자 후 주석이 서기로 근무했던 깐수와 구이저우성의 간부들도 재도약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민일보 / 오유신 기자 2004-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