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역사학회장, `중국 고구려사 왜곡` 정면 비판

북한이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강하게 비판했다. 허종호 북한 역사학회장은 19일 후쿠오카(福岡)에서 열린 일본 국립박물관 주최의 고구려 유적 심포지엄에서 "일부 국외 학자들이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식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엄중한 역사 왜곡"이라고 말했다.

허 회장은 북한 사회과학원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허 회장은 '중세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역사적 지위'란 제목의 발표 논문에서 "고구려는 (중국에 복속한 것이 아니라) 한.수.당 등 중원 정부와 당당히 맞서 싸운 자주적 주권국가였다"고 강조했다.

허 회장은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은 책봉 체제에 대한 무시이며 공개적 항거 표시였고▶고구려 시조가 천자(天子)로 자칭하고 임금들도 태왕.성왕 등 황제급 칭호를 사용했으며▶연개소문이 당나라의 내정간섭 기도를 물리치고 사신을 6년 동안 토굴에 감금한 사실 등을 근거로 들었다.

허 회장은 이어 중국이 '종주국-속국'관계의 근거로 내세운 당나라와의 조공에 대해 "봉건시대 국가 간 선물 교환이고 무역관계였으며 일보 후퇴해도 작은 나라가 생존을 위해 큰 나라와 평화적 선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허 회장은 당초 토론에만 참석하기로 했으나 회의 전날 갑작스레 논문 발표를 자청했다.

또 함께 참석한 북한 사회과학원의 조희승 고구려사 연구실장은 고구려 무덤 벽화를 주제로 한 발표문에서 "안악3호 무덤과 강서 덕흥리 무덤이 한인(漢人) 또는 중국 망명객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며 "무덤의 구조와 벽화 내용으로 볼 때 주인공은 고구려 사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사람은 '삼국사기를 믿지 못하겠다'는 등의 딱지를 붙이지만 이는 고구려사를 비롯, 조선의 높은 발전 수준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제무대에서 중국 비판을 자제해 왔으나 11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학술대회에서 남북 공조를 다짐했다.

이날 후쿠오카 회의엔 남북한.일본 외에 중국의 진쉬둥(金旭東) 지린(吉林)성 문물고고연구소장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중국 정부의 갑작스러운 참석 불허로 남북한과 중국 학자 간의 논쟁은 무산됐다.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한 임효재(고고학)서울대 교수는 "고구려사 왜곡이란 민족 공통의 문제를 놓고 남북한 학자들이 처음으로 국제회의에서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 역사학자 허종호·조희승씨

"북한에 방대한 고구려사 자료 축적"

"고구려 연구는 북조선이 가장 역사도 깊고 권위가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비할 바 아니죠. 역사란 것은 후세 사가들이 갑자기 뭐라고 주장한다 해서 일거에 바뀌는 게 아닙니다. "

일본 후쿠오카에서 만난 허종호 북한 역사학회장(사진(左))은 "고구려는 자주성이 가장 강한 나라였고 1000년 동안 존속한 동방의 '천년 강성대국'이었다"고 말했다. 함께 학회에 참석한 조희승 사회과학원 고구려 연구실장(사진(右))은 "사료를 편의적으로 해석해 왜곡하거나 고구려의 존재를 축소하려는 경향을 반박하는 연구성과가 오래 전부터 북조선에 축적돼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북한 학자들과의 일문일답.

- 최근 북한의 고구려 연구동향은.

"1960년대부터 각종 문헌, 금석비문, 발굴성과 등을 토대로 연구가 본격화됐다. 80년대엔 사회과학원에 '고구려사 연구실'을 설치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그 결과 '고구려사'(3권.손영종 저.1999년) 등 방대한 연구저작이 나왔다. 손 선생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구려사를 5권으로 늘려 집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의 정통성이 고구려에 있다고 본다. 고구려보다 신라 연구에 주력한 남측과 입장이 다르다. 사회과학원에 '신라연구실''백제연구실'은 따로 없고 고구려실에서 다 통합하고 있다. "

-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입장은.

"북측이 남측에 비하면 조용하게 대응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실은 정부 차원에서 대응해 왔다. 학자들은 구태여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도 이미 발표한 책과 논문에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 자료들이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국제학회에도 적극 참석할 생각이다. "

- 허 회장은 중국 베이징대 출신이어서 중국 학계에도 인맥이 있을 텐데.

"옛날부터 고구려사와 관련해 엉뚱한 주장을 하는 중국 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여서 대응할 가치도 없었다. "

- 남한 학계와의 공동 보조는.

"지난 11일 금강산 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활발한 교류를 해나갈 것이다. 예전부터 진행해 온 고조선 분야는 이미 공동 저술 단계에 들어갔다. 고구려사도 남북이 교류하면서 공동연구를 할 대목이 많다. "

(중앙일보 / 예영준 특파원 2004-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