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한글의 창의적 응용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아시아 대륙의 동북쪽에 아주 조그맣게 매달린 한반도, 거기에서 우리가 고유의 말과 문화를 보전하며 수천년 살아온 것은 기적에 가깝다. 아마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말을 글로 표기하기 위해 한자.일어.영어를 번갈아 빌려 쓰다가 인터넷 홍수를 맞는 지금쯤은 우리말 자체마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운명에 처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가 인도나 필리핀같이 거북한 타국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비극을 맞지 않은 것이 기쁘다. 그 공은 완전히 한글 창제에 있다. 우리 사회가 나락에 떨어지는 듯하고 국운이 쇠하는 듯 서글픈 느낌이 드는 요즈음 나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를 떠올리며 우리 민족에게도 위대한 영도자가 나올 수 있고 지혜가 번득이는 저력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현재 이 시각에도 세계에는 수많은 언어가 사라지고 있으며 지난 세기에 약 2000종의 언어가 사멸됐다고 한다. 필경 글자화되지 못한 군소 언어일 것이다. 일부 인사는 머지않아 영어 공용화로 우리말도 사라질지 모른다고 우려하지만 훌륭히 문서화된 한글이 있는 한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문화라는 것은 한 인류 집단이 의식주.말.생각을 공유하면서 자기네 방식이 편리하고 좋아서 그것을 오랫동안 계속 쓰고 키워나가면서 형성된다. 의식주는 타자의 것을 모방.수용하기가 쉽다. 지금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말은 타자의 것을 수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수월치도 않고 편리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욱 소중히 가꿔야 한다.

오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가장 기뻤던 일 중의 하나가 우리말로 신문과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말로 독서를 하면 영어로 하는 것보다 지식 섭취가 서너 배 되는 데다 우리말 자체가 주는 편안함과 재미 때문이었다.

지금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훔쳐 가려 한다고 나라가 들끓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동안 역사연구는 서양식 시대구분이나 계급투쟁의 시각에서 언제 우리나라에 자본주의가 도래했느냐, 아니면 양반과 상민 사이 또는 지배집단 간에 어떤 갈등이 있었느냐를 탐구하는 데에만 힘을 소진한 감이 있다. 언제 우리나라 곳곳의 사람들이 우리말을 공유하게 되면서 탄탄한 문화적 민족 통일을 이룩해 왔나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했다.

미국에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에 수백 종류의 원주민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썼고 지금도 체로키와 아파치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영어를 쓴다. 우리의 과거도 한때 그랬으리라. 우리는 부여나 마한이, 아니 삼국시대에 와서도 고구려.백제.신라가 한자 외에는 같은 말을 썼는지 아닌지도 잘 모른다. 물론 자료도 많지 않을 테지만 우리말 관련 연구의 중요성을 덜 느껴서일 것이다. 한글을 우리는 공기와 같이 고마움을 잘 모르고 그저 써온 것 같다.

오는 한글날에 바라건대, 언제부터 우리가 한반도에서 언어를 통일하며 동질성을 구축하게 됐는가에 대한 탐구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진 우리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순열 조합만 잘하면 세계 인구가 내고 있는 음성 대부분을 훌륭히 표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민망스럽게 번역되는 f, th, r, l 등을 이중자음을 응용.개발해서 표기한다면 근사치 소리에 성큼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나 중국어의 까다로운 모음도 새로운 이중 모음 개발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이 시대의 국제적 음성에 알맞게 다시 세련되게 조합되면서 한글이 더 번창하기를 바란다. 발상전환만 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래아 한글도 몇십년 죽어있다가 상업적 인센티브로 다시 살아나지 않았는가. 또 한국어의 영어 표기도 현행보다 세련된 방법이 발견되기를 바란다. 세종대왕도 이를 기뻐하시리라 생각한다.

<김형인 한국외대 교수.미국사>

(중앙일보 2004-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