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 섬뜩한 쑨훙(孫泓)과 고구려

“중국 역사는 ‘다민족 대가정(多民族 大家庭)’을 이뤄오는 과정이었다. 고구려는 때로는 반란하고 때로는 순종했지만, 대체로 중국 중앙정부에 순종했다.”

34세의 중국 여성 역사학자 쑨훙(孫泓)이 지난 16일 한 말이다. 그의 카랑카랑한 금속성 목소리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가 불거진 뒤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고구려사 국제학술대회장인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의 그랜드 볼룸을 짜랑짜랑 울려댔다.

쑨훙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역사학자 쑨진지(孫進己)의 딸이다. 올해 73세로 백발이 성성한 쑨진지는 ‘나는 이미 늙었지만 내 뒤에는 내 딸이 있다’고 과시라도 하듯, 딸을 데리고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서울에 나타났다. 쑨진지는 딸이 발표하기에 앞서 당당한 목소리로 “누가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만 했느냐. 고구려사는 중국도 계승하고, 조선(북한)과 한국도 계승하고, 그 일부는 일본도 러시아도 계승했다”고 외쳐댔다. “그러나 고구려 영토의 4분의 3은 중국이, 4분의 1은 조선반도(한반도)가 계승했으며, 인구의 3분의 2는 중국이, 3분의 1은 조선반도가 계승했다”는 황당무계한 궤변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딸 쑨훙의 언행은 ‘홍소귀(紅小鬼·어린 홍위병)’를 연상시키는 듯했고, 그녀의 ‘다민족 대가정’이라는 말에는 귀가 번쩍 뜨였다. ‘다민족 대가정’ ‘중국 대가정’이라니, 이게 어디서 듣던 소린가. 중국공산당이 티베트 독립문제를 두고 티베트인들을 설득할 때, 그리고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인들을 설득할 때 쓰던 말 아닌가. “여러 민족이 오순도순 한 가정처럼 살아가는 나라, 이것이 바로 중국 대가정….” 프랑스 감독 장 자크 아노가 만든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을 보고 격분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지시해서 다시 만들었다는 중국 영화 ‘티베트’에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나오는 말이 바로 ‘대가정’이라는 말이었다. “티베트인들도 한 식구를 이뤄 오순도순 살아가는 대가정 중국의 일부인 티베트를 침공한 서양 제국주의 군대들을 물리치기 위해…티베트인들과 중국인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그 ‘대가정’이란 말을 차마 서울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숙신(肅愼)도, 여진(女眞)도,…평화롭게 중국의 대가정에 융합돼 들어왔다. 고구려는 반란도 하고 순종도 했지만 대체로는 순종했다. 한국은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함께 한반도 대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의 대가정은 대체로 평화로웠던 반면, 고구려가 한반도 대가정의 일원이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으며, 백제와 신라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전쟁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그런 식이라면 중국 역사야말로 끊임없는 내전의 연속 아니던가.

이쯤 되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쑨훙은 역사학자인가,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이론가인가. 고구려사 문제를 역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이론인 ‘대가정’론으로 설명하는 쑨훙의 논리는 이미 역사학의 범주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쑨훙의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고구려사 왜곡문제는 이미 역사학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국면이라는 점을 깨우쳐 준다. 중국은 이미 고구려사를 놓고 패권주의의 길로 들어섰으며, 우리는 국제사회에 “중국이 미국을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더니, 이제는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패권주의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할 때인 것이다.

(조선일보 / 박승준 중국 전문기자 2004-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