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始祖 주몽은 북방족인 고리왕의 아들”

중국이 갑자기 고구려가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의 선조는 고구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중국 역사서에는 고구려와 고구려인에 대한 자료가 상당수 들어 있다. 중국의 대표적 역사서에 보이는 고구려인 관련 기록을 통해 중국이 실제로 고구려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살펴본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니 자기네는 그 선조가 주몽이라고 말한다. 주몽의 모친인 하백(河伯)의 딸이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들이비췄다. 몸을 비켜 피했으나 해의 그림자는 또 쫓아왔다. (중략) 자란 뒤 자를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니 그네들의 속어로는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말이었다.… 주몽이 물을 향해서 소리치기를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날 도망을 가는데, 뒤쫓는 군사가 가까이 이르렀으니 어떻게 해야 건널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하략)”

이 내용은 중국의 역사서 ‘위서(魏書)’ 열전 가운데 고구려전 앞머리에 실려있는 것이다. 북위(北魏)의 역사를 정리한 ‘위서’는 고구려의 시조 설화를 처음으로 담은 중국의 역사서로, 551년부터 554년 사이에 쓰였다.

북제(北齊)의 역사가가 북위 역사를 정리하면서 5세기 초부터 동방 강자로서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던 ‘고구려’의 역사를 그때까지 수집된 여러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것의 일부이다. 이같은 ‘위서’의 고구려 시조왕 설화는 ‘광개토왕릉비문’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인의 시조 인식 및 서술에 바탕을 두었음이 확실하다. 서기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서 건국 시조 주몽은 다음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옛적 추모왕(皺牟王)이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으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 (중략)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띠를 잇고 거북을 띄우라’고 하니, 말이 떨어지자 곧 띠를 잇고 거북을 띄웠다..”

두 서술은 약 150년의 시간적 거리에도 놀랄 만큼 비슷하다.

중국의 역사서에서 ‘고구려’를 구체적 서술 대상으로 잡은 것은 5세기 전반 만들어진 ‘후한서(後漢書)’부터이다.

그러나 ‘위서’ 이전에 편찬된 역사서에는 고구려의 시조 설화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7세기 전반 중국 당(唐)의 태종대에 완성되는 남조(南朝) 양(梁·502~557)의 역사서 ‘양서(梁書)’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구려는 그 조상이 동명(東明)으로부터 내려온다. 동명은 본래 북쪽의 이족(夷族)인 고리왕의 아들이다. 고리왕이 밖으로 다니다가 돌아왔더니 여자 시종이 아이를 배었다. (중략) 자란 뒤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스러움을 꺼리어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다가 남으로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떠서 다리를 이루었다. 동명이 타고 건너 부여에 가서 왕이 되었다. 그 뒤의 곁갈래가 고구려인이 되었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부여의 시조는 동명왕이라는 것이다. 고구려라는 나라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에 흡수된 지 이미 오래여서 남조시대 양나라 때는 더 이상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부여의 건국 설화를 소개하고 있는 셈이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는 사실상 큰 차이를 지니지 않았는데, 고구려 문자명왕(492~519) 즉위 후인 494년, 물길족의 압박을 받던 부여 왕실의 남은 자들마저 고구려로 투항해 옴으로써 부여라는 존재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부여의 설화와 전승들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고구려 역사의 일부로 녹아들어가 버린 것이다.

‘양서’ 고구려전에 소개되는 부여 건국 설화의 원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후한서’ 부여전과 ‘삼국지’ 부여전의 주석에 실린 ‘위략(魏略)’에 이른다. 옛 사료를 보고 썼음을 밝힌 ‘위략’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위략에는 이르기를 옛 사료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옛적 북방에는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이 하녀가 아이를 배어 죽이려 하였다. 그 후 아들을 낳았다. (중략) 동명이 활을 잘 쏘았다. 왕이 나라를 뺏길까 두려워 죽이려 하자, 동명이 달아나다가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동명은 건널 수 있었다.… 부여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부여의 시조 동명왕에 대한 설화가 고구려의 시조왕 설화의 모태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조왕 설화는 부여계 민족이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자를 떠받들고 영웅시하던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이 중국의 역사서에 담긴 것이라고 하겠다. ‘양서’를 전환점으로 삼아 부여의 동명 설화는 역사적 위치를 사실상 잃게 되고, 이후 편찬되는 ‘주서(周書)’ ‘수서(隋書)’ ‘북사(北史)’와 같은 중국의 역사서들에서 고구려의 시조 설화가 언급될 때에는 ‘위서’의 내용이 원본으로 사용된다.

‘주서’에서 주몽 설화는 몇 줄로 축약되어 언급된다. 하백의 딸 유화가 햇빛에 감응되어 낳은 알을 부여왕이 없애려고 애쓰다가 실패한 이야기, 성장해서 부여왕과 신하들로부터 핍박받고 죽음의 위기에 빠지는 과정 등은 완전히 생략된다. 역시 당 태종의 명으로 편찬된 ‘수서’에서도 ‘위서’의 주몽 설화는 축약되어 옮겨지지만, ‘주서’보다는 상세하다. 물론 ‘수서’의 고구려에 관한 서술의 초점은 수와 고구려 사이의 갈등, 두 나라 사이의 전쟁 경과 등에 두어져 있다.‘북사’ 고려전에 소개된 주몽 설화는 ‘위서’의 그것과 거의 다름이 없다. 이처럼 주몽에 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은 모두 중국 바깥 세계의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설명하는 ‘열전(列傳)’에 들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부여·예(濊)·한(韓)등과 함께 서술된다. 이는 중국인들이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오랫동안 고구려와 그 시조 주몽을 독자적인 국가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호태 / 울산대교수·한국고대사>

(조선일보 2004-9-17)

한국 역사책에선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성왕·재위 서기전 37~서기전 19)은 한국 쪽 역사서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전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 때 지방관이었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墓誌) 등 고구려 당시의 자료는 ‘추모왕(皺牟王)’이라고 기록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앞선 역사서인 ‘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하여 성이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추모(皺牟)’ ‘상해(象解)’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한편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세종실록지리지 등 후대의 기록에는 ‘추몽(皺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등도 발견된다. 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에 대해 일본 문헌에는 ‘도모(都慕)’라고 표기했다. 이처럼 다양한 이름에 대해 학계에서는 원래 ‘추모’ ‘중모’ 등으로 불리던 것이 뒤에 발음 기준으로는 ‘주몽’, 의미 기준으로는 ‘동명(東明)’으로 정리된 것으로 본다.

(조선일보 / 이선민 기자 2004-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