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중국 동북공정 대상지 흑룡강성을 가다

흑룡강(黑龍江)성. 아무르강, 즉 흑룡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맞닿은 중국 최북단의 성(省)으로 총면적 44만㎢, 한반도 전체의 2배가 넘는 광활한 땅이다. 지금은 길림(吉林)성, 요녕(遼寧)성과 함께 중국 동북3성 중 한 성으로 편입되어 있지만 수천년 전부터 한민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예(濊), 맥(貊)족 등 여러 동이족(東夷族)이 살면서 숱한 신화와 역사를 만들어낸 곳이다. 한때는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고구려의 강역이었으며 한때는 발해의 영토이기도 했다. 현재도 이곳엔 47만여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하얼빈시, 김좌진 장군이 말 달리던 해림 등 우리에게 감회를 자아내는 항일 유적들이 수두룩하다.

거리 곳곳 세련된 모습 휴대폰 광고

지난 8월말 흑룡강성 초청으로 이곳을 다녀왔다. 서울을 떠나기 전부터 그렇게 가슴이 뛰었던 것은 바로 그런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장을 볼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을까.

여행은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에서 시작했다. 하얼빈은 여느 중국 대도시와는 달리 역사가 일천하다. 19세기 중반까지는 흑룡강 지류인 송화강에서 어업을 주로 하는 어민들이 사는 한촌(寒村)이었다. 하얼빈이라는 이름도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의 만주어라고 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부설된 동만(東滿) 철도기지가 들어선 이래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었다. 

겨울철 얼음축제의 무대로 유명한 이 '얼음의 도시'가 아직도 낙후돼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하얼빈의 다운타운은 수십층이나 되는 현대식 빌딩들이 죽 늘어서서 서울 못지않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또 곳곳에서 새 건물을 짓는 현장이 눈에 띄었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중국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세련된 남녀 모델들을 내세운 휴대폰 광고가 나붙어 있었다. 상점 쇼윈도에 전시된 여성 의류들도 서울 거리의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얼빈을 벗어나자 풍경은 일변했다. 달리는 버스 창 밖으로 광활한 벌판이 전개됐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온통 평원뿐, 산이라 부를 만한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오직 보이는 것은 콩밭과 옥수수밭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방풍림뿐이다. 쪽빛 하늘을 수놓은 뭉게구름, 콩밭과 옥수수밭 사이에서 풀을 뜯는 소와 말떼가 어울린 대평원은 목가적이다. 그 망망한 대평야를 한참 달려야 가끔 만날 수 있는 작은 마을은 마치 섬 같았다. 아마 저 마을 어디엔가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조선족이 중국 사람들과 함께 오순도순 삶을 꾸리고 있으리라. 

하얼빈에서 동북 방향으로 8시간정도 달려 목단강(牧丹江)시에 도착했다. 인근 징박(鏡泊)호의 경치는 흑룡강성이 가장 자랑하는 것이다. 징박호는 약 1만년 전 화산 분출 때 생긴 중국 최대의 호수로 면적이 90㎢이나 된다. 유람선을 타고 두 시간 여를 돌았는데 호수의 절반밖에 돌지 못했다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유람선에서 본 호수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에메랄드 빛이 감돌았다. 징박호로 떨어져 내리는 징박폭포는 뜀박질하는 어여쁜 여인의 머릿결처럼 물결쳤다. 그 폭포를 에둘러 기기묘묘한 표정으로 늘어선 바위 봉우리의 조화는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이런 때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생기는 것인가. 들뜬 여행자가 자못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관광명소 중에 인상적인 곳은 징박폭포 인근의 폭포(瀑布)촌에 만든 조선족민속촌. 폭포촌 주변 상가에는 채시라, 최진실 등 한국의 유명 연예인이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대형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이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1,400㎞나 떨어진 무단장시 작은 마을에서 한류열풍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한국 신문화의 중국 진출 '역군'으로 인정해준 조선족에게 고마워할지 아니면 초상권 문제를 먼저 떠올릴지 궁금하다.

안중근 의사 거사 푯말 없어 아쉬워

원래 폭포촌에는 100여 가구 700여명의 조선족이 우리 민족의 풍습과 혼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흑룡강성 발해진 정부와 현지 국영기업이 7백만위안(약10억원)을 합작투자, 조선족의 삶과 풍속을 상품화하여 지난 8월 2일 개장했다. 민속촌의 한 관계자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민속촌을 만들고 있는데 조선족민속촌이 가장 관심을 끈다"면서 "현재는 하루에 500명 정도가 다녀가지만 곧 수천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기존 거주자들은 새집을 지어 이주시켰다. 하지만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는 초가 10여 채를 조선족민속촌 주변에서 볼 수 있었다. 민속촌 가옥형태는 '현대식 초가'였다. 민속촌은 널뛰기, 그네뛰기, 물레방아 돌리기 등을 시연,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을 들게 했다. 하지만 씨름은 샅바 대신 동그랗게 맨 끈을 한쪽 다리에 걸어 사용, 조금 생소한 느낌을 받게 했다.

민속촌 안에는 먼 옛날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봉화대가 있다. 여기서 '渤海東夏國(발해동하국)'이라는 인장이 발굴됐다고 한다. 발해동하국은 바로 발해가 패망한 뒤 출현했던 왕국이다. 안내원은 "이곳이 '발해동하국'의 발원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흑룡강성 북동쪽에 위치한 우다리안지(五大連池)시는 경치 못지않게 물과 화석으로 유명한 곳이다. 동명의 출생지로 기록(〈한단고기〉)된 흑룡강 상류 막하현에서 멀지 않은 우다리안지는 바둑판 모양으로 분포된 14개의 화산과 그 주변에 화산작용으로 만들어진 5개의 연못을 통칭하는 말이다. 특히 5개의 연못이 구슬 다섯 개를 꿴 듯한 호수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우다리안지는 한마디로 '화석 및 화산생태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14년 화산활동을 멈춘 휴화산 지역인 이곳에는 화산분출시 형성된 화산분기추, 6차례 화산기록을 알 수 화석층, 가치 높은 각종 형이상학적인 용암석과 화산탄, 부산, 용암굴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이밖에도 흑룡강성에는 용문석굴, 북극촌, 동북호랑이삼림공원, 금산경력사박물관, 대해림, 흑룡강, 상경용천부 등 관광명소가 곳곳에 산재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기념공원은 고사하고 거사를 알려주는 푯말 하나 없다. 상하이 시가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보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은 하얼빈역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당국이 대일본 외교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족으로 최고위층에 오른 이정호 흑룡강성 인민대회상무위원회 위원 겸 민족교무외사위원회 부주임은 "나의 마지막 꿈이 의거 현장에 추모비를 건립하거나 세계 명인들을 추모하는 별도 장소에 안 의사를 모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경계인

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 등 동북3성의 2백만 조선족 가운데 흑룡강성 조선족은 모두 47만명 가량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조선족 사회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현재는 36만명 정도라고 전했다. 돈벌기 위해 한국으로 간 조선족이 6만~7만명, 베이징-상하이 등 대도시로 빠져나간 사람도 수만명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조선족은 한족을 제외한 55개 중국내 소수민족 중 몽골과 함께 배후모국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족들은 민족정서가 강하고 겨레의 생활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자가 흑룡강성을 찾았을 때 아테네 올림픽이 한창이었다. 여러 종목에서 한국과 중국이 맞붙은 시합이 있었는데 조선족은 누구를 응원하는지 궁금했다. 조선족 사회의 지도급 인사는 "한국"이라면서 "그러나 조선족이 한국에 가면 중국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이국 땅에서 살다 고국을 찾은 한민족이 느끼는 섭섭함이 배어나오는 듯했다.

동북공정은 중국내 조선족들에게 '소외'를 되새김질하게 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내색할 수 없는 서글픈 처지라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중국편이나 한국편을 드는 일은 결코 없었다. 중국의 잘못을 지적하며 한국 문제도 곁들이는 식이었다. 조선족 한 인사는 "우리는 고구려사를 한국 역사로 배웠으며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것은 종이로 불을 싸는 격"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한국도 반성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한글 신문인 흑룡강성 신문 박일 총편집인은 "우리 신문이 동북공정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 것은 당기관지로서 그 문제를 다루기 곤란하기 때문"이라면서도 "한국과 북한이 이 문제에 공동 대응키로 했다니 퍽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조선족들은 고구려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인지 잘 알지 못했다. 30대 초반의 한 조선족 지식여성은 "동북공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역사를 어떻게 바꾸냐, 중국이 자기 역사라고 주장할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반응이 엇갈리는 연령은 35세라고 한다. 대체로 30대 중반 이상은 아버지, 할아버지 등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어른의 영향을 받은 반면 3대를 넘은 조선족에게는 민족의식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결혼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이전에는 조선족끼리의 혼인이 관습이었으나 점차 한족과의 결혼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메이커 / 김경은 기자 2004-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