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콤플렉스

중국은 서기 1000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주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다.

중국의 변방국 중 중국을 먹어보지 못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거란의 요(遼)나라와 여진의 금(金)나라가 200년 이상 중국을 반점했고, 뒤이은 몽고의 원(元)은 11대 109년간, 여진의 청(淸)은 12대 279년간 중원을 장악했다.

중화민국이 성립될 때까지 912년간 이민족에게 지배받은 기간이 500년을 넘어선다.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한국은 고려 시대의 몽고와 조선시대의 청나라, 일본에 의해 역사가 단절되거나 정복되는 비운을 겪었다.

하지만 중국보다는 이민족의 지배기간이 길지 않았다.

어려운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혈연공동체를 끈질기게 유지해왔다.

우리가 유달리 민족의식이 강하고 역사에서도 민족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이유다.

▲ 어제 고구려재단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이런 한중의 상이한 역사의식이 충돌했다.

동북공정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심양(瀋陽) 동아연구소의 손진기(孫進己) 연구주임은 “고구려 영토의 3분의 2, 인구의 4분의 3을 계승한 중국이 주된 계승국”이라 주장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과 한국이 나눠 가지는 일사양용(一史兩用)의 논리를 폈다.

▲ 손 주임의 주장은 역사를 영토의 주인 위주로 바라보려는 중국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아니라 땅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이민족임에 틀림없지만 그 땅을 중국이 가졌으니 중국 역사라는 궤변이다.

요, 금, 원, 청의 지배를 받았던 중국인다운 발상이다.

한족과 이민족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그들의 역사적 콤플렉스가 감지된다.

▲ 그의 말대로라면 영국에 지배를 당한 인도민족은 영국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반도를 식민화한 일제의 역사도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돼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중국을 침공하여 중국인민들을 한국화시키면 중국 역사를 우리 역사로 당겨올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그의 역사관은 진실을 탐구하는 학자의 것이 아니라 정치의 사주를 받은 패권적 어용사관이다.

중국이 얼마나 답답해 이런 허무맹랑한 논리를 들이대는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매일신문 / 박진용 논설위원 2004-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