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평양 중심주의와 어정쩡한 왕검성 위치

소위 '단군릉'이 발굴된 1993년은 여러 모로 북한에는 의미심장한 해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대동강 문명론'을 들고 나왔다. 중원 문명에 뒤지지 않는 선진 문명이 대동강 유역에는 꽃피고 있었고, 그 주체 세력이 단군으로 대표되는 고조선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북한은 신화라는 영역을 벗어나기 힘들던 단군을 '단군릉'에서 출토 됐다는 부부 인골에 대한 과학적인 연대측정 결과에 기초했다면서, 약 5천년 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덩달아 고조선 중심지 또한 기존에 통용되던 요동설을 버리고 '단군릉'이 확인됐다는 평양으로 갑자기 바꿔버렸다. 평양 중심설은 단군조선뿐 아니라 위만조선에도 적용됐다.

16-17일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주최 제1회 국제학술회의에 전달된 북 한 학계의 논문 한 편을 보면 고조선과 단군을 둘러싼 북한측의 이러한 대전환에 따른 고육지책을 용이하게 읽어낼 수 있다.

북한측이 보내온 논문 몇 편 중에서도 기원전 108년, 한무제(漢武帝)가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영역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중 낙랑군(樂浪郡)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논한 김유철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의 글이 특히 그랬다.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위치 문제에 대하여'라는 이 글에서 김유철은 위만조선 멸망 당시, 각종 사서에 그 도읍으로 기록된 왕검성(王儉城)을 지금의 평양으로 본다. 단군릉 발굴 이후 확립된 새로운 학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이다.

「사기」와 「한서」 등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는 왕검성을 함락함으로써 조선 정벌을 완결하고는 그곳에다 낙랑.진번.임둔.현도의 4군(四郡)을 설치했다. 이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설치된 낙랑군은 옛 조선 도읍인 왕검성 일대를 차지했다.

김유철 또한 이 논문에서 낙랑군 설치 장소가 위만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우거왕이 웅거하고 있다가 최후로 함락된 왕검성 일대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한나라는 고조선의 왕검성을 함락한 다음 거기에 락랑군의 수현(군의 소재 지 현)인 조선현(朝鮮縣)을 설치하였다"는 언급에서 잘 확인된다.

따라서, 이에 의한다면, 고조선 중심지인 왕검성을 평양 일대로 보는 한, 낙랑군이 설치된 장소는 지금의 평양 일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김유철은 이 논문에서 왕검성 및 그 일대에 설치됐다는 낙랑군의 위치를 엉뚱하게도 오늘날의 랴오허(遼河)강과 인접한 연안 도시인 개현(蓋縣) 일대로 간주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그는 각종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든다.

예컨대 연(燕)과 진(秦) 왕조가 고조선과의 서쪽 변경에 설치한 요동군(遼東郡) 은 오늘날 요서지방이며, 전한(前漢) 전기 때 고조선과 한나라 경계인 패수(浿水)는 랴오허강 서쪽을 흐르는 다링강(大凌河)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의 위만조선 정벌 과정을 언급한 기록을 볼 때 왕검성은 열수(洌水)라는 강이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어귀 부근에 있다는 내용 또한 개현(蓋縣) 일대의 지리적 환경과 맞아떨어지며, 실제 이 일대에는 고조선 유력 지배자들의 무덤인 고인돌묘가 밀집돼 있는 고고학적 증거도 보태고 있다.

이에 김유철은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한 락랑군이 조선반도의 서북지방 (즉 평양 일대)에 틀고 앉아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언뜻 보면 단군조선 및 위만조선 도읍지는 왕검성이며, 그곳은 지금의 평양 일대라는 93년 이후 북한 학계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데 왕검성과 낙랑군 위치를 둘러싼 북한의 묘한 '역설'이 숨어 있다. 즉, 김유철을 포함한 북한 학계는 고조선 도읍지(중심지)는 평양 일대로 보면서도, 아울러 낙랑군이 설치됐다는 왕검성도 요동이라고 본다.

위치가 전혀 동떨어진 같은 지명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묘안'은 하나밖에 없다. 같은 이름을 지닌 도시가 동시에 있었다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유철은 이 글에서 평양 일대의 왕검성과 랴오허강 인근 개현 일대 왕검성을 각각 '기본수도'와 '부(副)수도'로 간주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방증자료로 김유철은 "고구려 시대에 기본수도 평양이 있고, 그 남쪽과 북쪽에 또 다른 부수도 평양(남평양과 북평양)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위만조선의 마지막 우거왕과 그 신민(臣民)들은 기원전 108년 무렵, 한나라 대군이 서쪽 변경의 부수도 왕검성에 침입하자 몽땅 기본수도 평양을 떠나 지금의 요동 개현 일대에 있던 부수도 왕검성에 옮겨 항거한 셈이 된다.

하지만, 설혹 고구려에서 '기본수도'와 '부수도'를 같은 평양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고조선 또한 그랬다는 증거는 결코 될 수 없다. 당장 동시대 백제와 신라를 보아도 '기본수도'와 '부수도'를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는 증거가 없다.

또한 다른 무엇보다도, 김유철을 포함한 북한 학계의 주장처럼, 고조선이 기본 수도와 부수도를 모두 왕검성으로 불렀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포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무제가 위만조선 정벌군을 파견할 그 당시 한나라 조정 사관인 사마천이 남 긴 기록에 의하면 위만조선의 마지막 항거지 왕검성은 '기본수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처럼 기묘한 왕검성 위치를 둘러싼 북한 학계 주장에서 더욱 주목되는 점은 부수도 왕검성이 실은 93년 '단군릉' 발굴 이전에는 '기본수도' 왕검성이 있던 것으로 간주되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즉, 북한은 단군릉 발굴을 계기로 왕검성을 급작스럽게 요동에서 평양으로 변동 시키는 대신, 기존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기가 못내 아쉬웠던지, 단군릉을 따라 평양으로 옮겨가버린 '애초의 텅빈 왕검성' 터에는 '부수도 왕검성'이라는 증거가 전혀 뒷받침되지 않는 '허상의 도시'를 만들어 앉혔던 것이다.

고조선 중심지를 이렇게 바꾼 데 대해서는 이미 관련 학계에서 북한 수도인 평양을 역사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는 요지의 많은 지적이 있었다.

어떻든 왕검성과 낙랑군 위치를 둘러싼 북한 학계의 주장은 '어정쩡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