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바로보기]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오늘날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나 발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별로 논의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발해사는, 그동안 고구려사를 삼국사에 포함한 것과는 달리 ‘우리 역사’라는 의식이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뒤 당은 안동도호부를 두었으나 점령지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곳곳에서 벌어진 유민들의 세찬 저항운동 때문에 안동도호부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런 과정에서 당은 중국 관내에 속하는 영주(營州)에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 말갈족 등 북방민족을 옮겨와 살게 했다.

걸걸중상(乞乞仲象)·걸사비우와 대조영(大祚榮) 부자도 이곳에 와서 살았다. 대부분의 기록은 ‘고구려의 별종’이라 했다. 이들은 현지 도독의 부당한 압제에 맞서 저항했다. 그 지도자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 등은 영주를 빠져 나와 영토를 확장했다.

그 도중에 걸걸중상·걸사비우 등은 죽고 대조영이 말갈군과 고구려 부흥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면서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는 698년 동모산(지린성 둔화시 성자자산)에 도읍하고 진국(震國·동방 나라의 뜻)이라 했다. 고구려가 멸망 당한 지 30년 만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그 대씨(大氏)는 누구였던가? 그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그들이 차지했던 땅은 우리의 고구려였다’고 썼다.

대조영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신라 등 주변 국가에 알렸다. 당에서는 관례대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대조영은 나라를 세운 지 21년 만에 죽었는데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고구려 왕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그의 아들 무왕은 발해의 독자 연호를 쓰면서 당에 대해 독립국임을 강조했다.

3대왕인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일컬었으며 일본에서는 발해에서 전해진 음악을 고려악이라 불렀다. 그러나 중국의 사가들은 ‘참칭’(僭稱·거짓 호칭을 쓰는 것)이라 비난을 퍼부었다.

발해는 정복전쟁을 활발하게 벌여 남쪽으로는 압록강 상류 언저리까지(뒤에 대동강 상류까지 내려왔다) 내려와서 당의 지경과 맞댔다. 서쪽으로는 요동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여 당·거란·돌궐과 경계를 삼고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함경도 아래 지역까지 내려와서 신라와 맞닿았다. 북쪽으로 송화강 상류에서 흑수부와 경계를 삼았다. 고구려 영토 3분의 2를 확보한 것이다.

예전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후신임을 자처한 발해를 두고 발해라 부르기도 하고, 발해말갈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냥 말갈이라 부르기도 했다. 말갈이라는 용어는 중국 동북방의 이민족을 통칭하는 낮춤말이다. 일본 학자들은 발해의 상층부는 고구려 유민이었으나 하층부는 말갈 사람이라고 하여 그 한계를 그었다. 얼핏 들으면 발해는 다민족국가로 한국사에서 제외되어도 되는 왕조가 된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부흥을 목적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국 역사가들도 결코 이의를 달지 않는다. 다만 일부의 기록에 대조영이 속말말갈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말갈족은 끊임없이 이동하여 서쪽으로 진출했다. 그들의 중심세력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고구려에 복속했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외부의 침입을 받을 때 고구려에 속해 힘을 합해 싸웠다. 이들은 영주 등지에서 고구려 유민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걸사비우와 대조영이 거사할 때 공동운명체로 함께 참여했고 이어 동쪽으로 진출할 때에도 합류했다. 걸사비우가 죽고 나서도 별도의 행동을 보이지 않고 새 나라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니 말갈족은 바로 고구려 주민이요, 유민이었던 것이다.

다음 발해의 지배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일본에 사신으로 간 사람은 고제덕(高齊德)이었다. 일본 학자가 이 점에 착안하여 일본에 갔던 32명의 성을 조사했는데 22명이 고씨였다. 또 성이 밝혀진 발해 사람 317명을 조사해보면 대씨가 90명, 고씨가 56명이었다. 대씨는 발해 왕족의, 고씨는 고구려 왕족의 성이며 나머지 밝혀진 성씨들도 거의 고구려 귀족들이었다.

이를 보면 발해왕조는 고구려 유민 또는 귀족이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다.

말갈 출신들은 전혀 지배층에 낄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민족이 중국에 세운 나라들도 말할 나위도 없이 중국 사람들을 지배층에 끼어 넣었다. 발해도 중국의 경우처럼 새로운 성을 주어 지배층에 동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에 동화한 말갈이 이룬 왕조로 200년 넘게 유지했다. 만약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말갈 혈통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차별하여 하부세력으로만 만들어 놓았다면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정복전쟁을 거쳐 여러 민족을 지배하면서 유지했다.

그런데도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모두가 말갈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고구려 색깔을 지우려 하고 있다. 발해의 영역을 확인해보자. 발해는 756년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는 대역사를 단행했다. 수도를 옮기는 일은 여러 세력의 이해가 얽히고 재정부담이 커서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천도를 과감하게 단행했던 것은 그만한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상경용천부는 목단강 유역, 즉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이다. 도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한 가운데에 자리잡았다.

근래 이곳의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규모가 당시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성으로 꼽힌다고 한다. 문왕은 56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죽었다. 고구려 장수왕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문왕은 해동성국의 기초를 만들었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可毒夫)라 불렀다.

또 다음 아들이 될 맏아들을 부왕(副王)으로 삼아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겼다. 중앙직제는 3성6부 체제였다. 최고 책임자는 대내상(大內相)이었으며 6부는 충부·인부·의부·지부·예부·신부로 각기 분담해 행정을 맡았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본받지 않고 발해의 실정에 맡게 행정체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방의 행정제도는 중앙과 동서남북에 5경(京)을 두었으며 그 아래 15부(府)를 두었다. 부여의 옛 땅에는 부여부를 두어 거란에 대비한 군사를 주둔시켰고, 고구려도 확보하지 못한 연해주 땅에는 솔빈부를 두고 말을 기르게 했다.

신라는 대동강 남쪽과 원산만 아래 쪽까지 경계로 삼았다. 일본은 동해를 거쳐 동경용원부(지금의 훈춘) 또는 상경용천부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신라는 압록강을 건널 수 없어 황해 바닷길을 거쳐 발해만의 등주·내주로 들어갔다. 발해는 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228년을 유지한 뒤 거란족이 세운 요(遼)에 926년 멸망당했다. 고려는 발해를 계승했다고 표방했다. 그 정통성을 고려가 이었던 것이다.

-唐 과거 응시자격 등 사고 마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들 속에는 신라의 유학승과 유학생이 많았다. 발해도 안정기에 당나라와 화해를 유지하면서 유학생들을 보냈다. 유학생은 일단 10년을 기한으로 했다. 그리고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응시했다. 빈공과는 주변국 출신의 인사들에게 보이는 당나라의 특별 과거시험이다. 시험에서 신라 사람들이 거의 1등을 차지했다. 일단 합격해 벼슬을 받으면 10년쯤 더 머물 수 있었다. 최치원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합격은 외국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하찮은 벼슬이라도 얻을 수 있었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고관이 될 수 있는 큰 경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빈공과 합격자는 신라 학생들이 휩쓸었다. 당이 멸망하여 폐지될 때까지 총 70여명의 합격자 중에서 신라 학생이 모두 58명이었다. 일본이나 티베트 학생들은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으로 허덕거렸다.

그런데 9세기 중엽부터 발해 유학생들이 응시하면서 신라의 독점이 깨지기 시작했다. 신라는 발해의 참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구악을 저버리고 이속(異俗)붙이를 참여시킨다”고 항의했다. 신라가 발해 유학생의 빈공과 응시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872년 빈공과 시험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발해 유학생 오소탁이 신라 유학생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최치원도 분통이 터져서 “이미 사방의 기롱을 불러왔으니 한 나라의 수치로 길이 남을 것이다”라고 내뱉었다. 최치원은 훗날 발해 유학생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뒤 “실로 공정하여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고 자랑했다. 발해 유학생은 통틀어 10여명의 합격자를 낸 것으로 보인다.

897년 발해는 발해의 국력이 신라에 앞서니 외교사절이 앉는 차례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신라의 사절이 앞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석차쟁장사건(席次爭長事件)이다. 물론 당 조정이 거절했으나 신라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발해의 국력이 신장되자 신라의 라이벌 의식이 더욱 세어진 것이다.

예부터 발해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적었다. 신라가 오래 나라를 유지하면서 발해를 깔아뭉갰고, 발해의 영역이 저 멀리 북쪽지대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또는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고 연구한 학자들은 실학시대의 유득공·정약용이 있었고, 해방 뒤에는 이우성·송기호 등이 있다.

<이이화 / 역사학자>

(경향신문 2004-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