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기자 북한 방문기.."가슴 아픈 감동의 나라"

"북한은 순진무구한 아름다움과 자유에 대한 억압이 공존하는 가슴 아픈 감동의 나라였다."

빌 라멜 영국 외무차관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리처드 로이드 패리 기자는 북한에는 너무나도 순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면서 "왜 그들은 질서와 자부심,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자유가 없는 나라를 만들었을까?"라고 반문했다.

다음은 15일자 더 타임스에 게재된 `북한에서 온 편지'란 제목의 북한 방문기.

"러시아제 항공기가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북한은 `절대적인 이질감'의 나라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건국의 아버지이자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죽어서도 국가주석직을 유지하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거대한 초상화가 눈에 들어 왔다. 이어 수레를 단 소가 장작을 싣고 흙길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핵탄두를 만들기 위해 플루토늄을 재처리하고 있는 이 나라의 들판에서는 아직도 농부들이 1천년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최근 수년간 수많은 외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로 널리 알려진 북한을 방문했지만 여전히 북한 땅에 발을 내 딛는 것은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미치광이 정신병자의 나라라는 북한의 이미지는 오도된 것이며 정확하지 않은 것이었다. 북한은 기이하고 복잡한 나라였지만 동시에 조용하고 아름다우며 이상하게도 감동을 주는 나라였다.

북한이 주는 매력의 대부분은 이미 서방 세계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 같았다. 차는 있었지만 많지 않았고 평양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광대한 도로에는-북한에는 신호등이 없기 때문에-흰색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발레를 하듯 우아한 몸짓으로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는 단 하나의 광고판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국가와 군, 사회 주의, 그리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홍보물들 뿐이었다.

그리고 평양의 지하철은 `시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중교통수단이었다. 엄청난 길이의 에스컬레이터가 지하 승강장으로 뻗어내려 있었고 벽면은 순백색이었다. 승강장은 19세기 오페라 무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벽면에는 대동강변의 아름다운 봄을 묘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평양 시민은 선택된 엘리트들로 거주허가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단순하게 살았던 옛날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었다. 평양에 내린 큰 비 속에서 빛나는 색의 장화를 신고 종종걸음으로 일터로 나가는 평양시민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심지어 북한 군인들의 군복에서도 옛날의 향수가 묻어났다. 높고 큰 모자에 지나치게 큰 견장이 그러했다. 여성과 여학생들은 전통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사치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없었지만 지저분한 모습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평양에서 외국인은 투명인간이 되는 듯했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아예 없었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공백이 된 느낌이었다. 지하철로 들어가면 승객들은 조심스레 자리를 비켰다.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가 당국의 심문을 받는 불편함을 자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항상 감시의 눈을 떼지 않는 사려 깊은 북한 정부의 권유로 몇몇 사람들은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

지하철 역사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장지민이라는 의사가 그랬다. 그는 큰 목소리로 북한이 올림픽 역도에서 은메달을 땄다고 자랑했다. 나는 어느 나라가 가장 많은 메달을 땄는지 아느냐고 물었고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이웃인 중국이라고 답했 다. 하지만 정답은 미국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아름다운 스커트를 입은 전혜영이란 젊은 여성은 관광과 호텔경영을 전공하고 있다면서 "호텔에 취직해 나라가 해 준 모든 것에 보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90년대에 수십만명 또는 수백만명이 굶어죽었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만을 제공받는 주민들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전양의 발언이 진심에서 나온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분노와 조롱이란 반응을 야기했다. 동행한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체제에 대해 야유로 조롱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북한 주민의 순수, 순결함이 중상의 대상이 되고 순백과 부패가 공존하는 현실에 가슴이 아 파옴을 느꼈다.

왜 북한과 같이 질서가 있으면서도 자부심과 순수함으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면서 자유를 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됐을까? 이념과 억압의 큰 격차가 외국인과 북한 주민을 갈라놓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적인 신호들이 그 위를 가로지르며 그물처럼 잔금을 생기게 하고 있었다.

광대한 김일성 광장에 두 소년이 책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을 흔들며 다가가려 하자 소년들은 놀라며 서로를 바라본 뒤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 갔다. 이번에는 그들은 외국인과 말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연합뉴스 / 이창섭특파원 2004-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