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서] '연좌제'는 살아 있다

신라는 신분제 국가였다.

경주 중심의 지배권력을 위한 골품제가 그것이다.

왕족인 성골과 진골이란 골제 외에 일반 귀족에게 적용 되는 여섯 등급의 두품제가 있었다.

왕족이 아니면 누구라도 최고 벼슬은 6두품이었다.

설계두는 고국 신라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당나라 군에 들어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그는 '신라는 골품만을 따져 그 족속이 아니면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그 한계를 못 넘는다'며 친구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신동이라 불리며 학문적 명망을 크게 떨친 최치원도 신분제란 벽에 부딪쳤다.

그는 신라에서는 원대한 꿈과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했다.

그 역시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신라에 돌아와서도 자신의 개혁관이 도저히 투영되지 못하는 현실을 비관해 각지를 떠돌아 다녔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소설 홍길동전에 당시 적서 차별이 그대로 드러난다.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와 형을 그대로 부르지 못한다.

공직에도 진출하지 못한다.

소설은 이 같은 불평등한 조선의 신분제도와 사회 부조리를 질타하고 있다.

결국 홍길동은 인간 평등 사상이 지배하는 낙원인 율도국에 들어간다.

어느 시대이건 그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층이 있다.

이들은 모든 법과 체제를 그들에게 유리하게끔 항상 이끌어간다.

목표는 비 기득권층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유형,무형의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한다.

누가 현대는 민주주의가 꽃피는 시대라고 했는가. 지금도 주류와 비주류란 그 기본적 형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민주주의의 모범국이라 하는 미국도 사실은 백인 주류의 사회란 것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한반도는 남북 및 좌우의 이념 대립이란 큰 불행을 맞았다.

북한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기득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여러 방편이 나왔다.

그 하나가 연좌제로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그 범죄의 연대책임을 지우는 제도다.

이야말로 남북 어느쪽 이든 그들 체제를 고수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을 거치면서 부분적으로 잔존하던 이 연좌제는 우리의 경우, 지난 1980년 제8차 헌법개정으로 완전히 폐지됐다.

그래서 이 연좌제가 종료됐는가. 아니다.

법조항은 그 특정부분의 허울적인 명시에 불과하다.

사회 전반의 연좌제적 시스템 작동까지 끝났다고 보는 시각은 순진하다.

곳곳에 '차별성'으로 상징되는 기득권층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연좌제적 성질의 어떤 것이 살아 숨쉬고 있다.

대표적인 게 학벌이다.

한국에서는 누구에게라도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단순한 학력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 죽고나서까지 따라다니는 지울 수 없는 일종의 '낙인' 같은 것이다.

좋은 학벌은 그 자체만으로 여러가지 프리미엄과 대우를 누린다.

법적 조항은 없애면 되지만 이것은 제거할 방법도 없다.

속수무책이다.

이보다 더한 연좌제가 어디 있는가. 어떤 개인적 능력과 역량도 이 학벌 이란 것을 뛰어 넘을 수 없다.

학벌은 사회 구성원의 한계이자 벽이 돼 버렸다.

이에 따라 한국사람들은 좋은 학벌에 '모든 것'을 건다.

사교육이 극성을 부리고 '과외 망국론'이 나온지 오래다.

이도 모자라 이제는 '고교등급제'란 일종의 연좌제까지 등장했다고 시끄럽다.

역시 모태는 학벌이다.

그 수혜 대상이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부와 기득권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강남지역이다.

고교의 내신 등급이 같은 것도 아니고 한참 떨어지더라도 수시입학시험에서 어떤 대학에는 강남지역 고교 출신이 강북보다 우선적으로 합격할 수 있다고 한다.

강남과 강북의 차별이 이럴진대 하물며 지방에 대한 푸대접은 어떠랴. 대학 측은 구구한 변명을 하나 설득력이 없다.

명백하게 연좌제다.

고교등급제란 것은 눈망울 초롱초롱한 한국 청소년들의 공정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여지 없이 부숴버린다.

대학 신입생 선발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일부에 특혜를 주기 위한 그런 억지 등급을 만들어 내는가. 제2의 설계두,최치원,홍길동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

대학은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이 나라의 비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부산일보 2004-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