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平堀起’와 중화 패권주의

최근 총리실은 직원들을 모 기업의 연수원에 입소시켜 총리실의 분위기를 심기일전하는 연수를 실시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정부 부처들도 민간기업에 이런 교육 연수에 관해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지난해 말 중국이 중앙정치국원 등 고위 지도층을 대상으로 ‘강대국 흥망성쇠사(史)’를 집단 교육한 사례를 연상케한다.

교육 내용은 세계 주요 국가의 발전,성쇠에 관한 역사로서 특히 15세기 이후의 세계 역사,세계 경제,일자리 창출과 경제,과학 기술,국방 분야에서의 변화와 혁신,중국 헌법,중국 공산당의 사상 이론과 역사 고찰,세계 문화산업 고찰과 중국의 문화산업 건설 대책,법치 및 정치문명 국가 건설 등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졌다. 즉 정치,경제,법률,군사,역사,문화에 이르는 모든 주제를 놓고 핵심 지도자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15세기 이후 세계 주요 패권국 발전사의 성쇠 원칙과 관련해 제기된 질문들은 ①무적의 패권국이 어떻게 영국,네덜란드,스페인 등 중국에 비하면 작은 변방 국가에 의해 이룩되었는가? ②왜 대제국이 쇠퇴 또는 멸망하였는가? ③왜 역사 상의 강대국이 1세기 정도의 패권만을 유지하였나? ④여기에는 어떤 원칙과 공통점이 있나? ⑤중국은 이들 역사로부터 어떤 경험과 교훈을 배울 것인가 등이었다.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바꾸고 있듯 여차하면 7세기에 중국이 설치했던 웅진 도독부와 안동 도호부를 근거로 아예 한반도 전체를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실제로 중국 역사부도에는 7세기의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이 당나라의 영토 색깔과 동일하게 칠해져 있다.

중국은 또 올 초에는 당,정,군과 지방 성의 부급 관리,대군구(大軍區)의 장성을 아우르는 고위 관리들을 중앙당학교에 입교시켰다. 이들은 사상 이론과 정부 시정(施政)의 새로운 방침뿐만 아니라 장쩌민 전 주석의 3개 대표론,세계무역기구(WTO)와 금융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중국의 고위 간부 교육은 작년 가을 16기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채택된,‘인재로 근본을 삼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한다’는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꾸준한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하여 지도적 위치에 있는 간부들의 사상,인식의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면에서 중국은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원자탄과 수소탄을 보유하고 있고 유인 우주선과 전투기를 포함한 군수산업에서는 우리가 쫓아가기 어려운 선진 기술을 보유한 선진국이지만 이제는 다른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우리를 앞지르는 무서운 이웃이다.

55년 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현재의 원자바오 총리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수없이 강조해왔다. 또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비동맹권의 맹주로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지금의 현실은 우리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쪽으로 가고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화평굴기(和平堀起)’로 변하는 저간의 상황을 지켜볼 때,또 2002년 월드컵 축구와 최근의 아시아 축구대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고조하는 ‘중화 민족주의’를 바라볼 때 오늘의 중화 민족주의가 내일의 ‘중화 패권주의’로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중국의 변화에 대응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올바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의 평화와 번영은 결코 이웃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우리가 바른 전략과 방향을 취하여 쉬지 않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약소국인 캄보디아의 전 국가원수 시아누크가 지난 날 펼쳤던 줄타기 외교와 조선의 광해군이 명·청(明·淸) 사이에서 역시 줄타기 외교를 통해 국익을 지키려 했던 옛일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김지수 / KAIST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국민일보 2004-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