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강하고 크고 밝은 나라는 어떻게 만들까요"
"온 국민 따르는 哲人같은 지도자가 나와야지"

스승 김흥호 前 梨大교수, 제자 심중식 교수

심중식 = 현대는 격변과 혼돈의 시대라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IMF이후 급격한 변동과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요즈음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염려하고 불안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안심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또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흥호 = 칼 야스퍼스는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특징을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라 했는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정말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라 할 수 있지. 계속 강도와 살인마까지 나와서 이제는 밤길을 다니기도 어려운 공포의 시대가 되었잖아. 그리고 속이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유기농이라 해도 믿을 수가 없고 병든 고기니 불량 만두니 해서 먹을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불안한 시대가 되었어. 또 도산하는 기업은 늘어나 일자리도 없어지고 실직자가 많아서 노숙자가 늘고 카드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생기고, 빚을 감당 못해서 기차로, 한강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이런 절망의 시대야. 우리의 현실은 정말 비참하고 불행한 시대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런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변하여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사회가 되어야 모두가 행복하게 되지.

심 =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가득한 사회를 만들 수 있나요?

김 = 야스퍼스가 불안과 공포와 절망을 이야기 하면서 비유로 생각하는 것은 계란이야. 계란은 발이 없어서 굴러다니는 것이니까 불안하고 또 깨질까 두렵지. 그리고 갇혀있으니까 가만두면 썩고 말기 때문에 절망이야. 철학이란 이렇게 보면서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관觀이라 해. 그러니까 알이라면 깨어나야지.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알에서 깨어나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되면 하늘 높이 나는 희망과 높은 바위에 우뚝 설 수 있는 믿음과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랑이 되는 거야.

영국 등 선진국을 가서 보면 사람들이 모두 희망에 싸여있고 일자리는 많고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는 신용사회지. 이것들은 모두 바른 교육을 통해 이뤄지지. 초등학교에서부터 적성과 소질을 발견해서 진로를 알려주고 기술과 학문을 배우게 해. 대학에 가려해도 먼저 몇 년 동안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하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거든. 우리처럼 대학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지. 그리고 초등교육에서부터 정직을 가장 높은 덕목으로 가르쳐. 그래서 가장 나쁜 것이 거짓말이라 생각해. 거짓이 없으니까 서로 믿고 사는 것이지. 또 어디를 가거나 거저야. 병원에 가도 거저 치료해주고 박물관에 가도 거저야. 일체를 나라에서 책임지는 것이지. 또 일손이 필요하면 자원봉사자들이 나와서 도와주는 말하자면 사랑의 세계지. 이런 세계가 행복한 것이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목적을 행복이라 했는데 이런 이상세계를 건설하자는 말이지.

심 = 플라톤은 그런 이상세계가 나오기 위해서는 철인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하거나 그래야 된다고 했는데 철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김 = 바위처럼 강하고 물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철인이지. 예수처럼 세상의 모든 악을 이긴 강한 사람이요 큰 사람이요 밝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또 행복한 사람이지.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도록 강한 나라, 큰 나라, 밝은 나라를 만드는 그런 사람이 철인이지.

심 = 그렇게 강하고 크고 밝은 철인이 되는 방법을 또 여쭤보겠습니다.

김 =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자면 절대자와 만나야 돼. 절대자와 만나야 철인이 되고 철인이 나와야 이상국가가 되는 것이지. 우리 시대로 말하자면 대통령이 철인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이상국가가 된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온 국민을 행복하게도 할 수 있고 불행하게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리야. 대통령은 온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그런 큰 사람이라야 되고 또 그런 사람이 되려면 절대자와 만나서 철인이 되어야 해. 행복을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 하는데 이 말처럼 하나님과 같이 사는 행복한 사람이요 그래서 또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철든 사람이지. 하나님을 만나서 깬 사람, 철인이 되면 멀리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지게 되고 일체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게 되고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날개를 가지게 되지. 그래야 또 강한 나라가 되고 큰 나라가 되고 밝은 나라가 되는 거고.

심 =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우리나라도 고구려 시절에는 정말 강하고 크고 밝은 나라였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합작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그만 우리의 기상이 꺾이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약하고 힘없는 약소국이 되어 신라 고려 조선으로 내려오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신라의 기복신앙과 고려의 사대주의 그리고 조선의 당파싸움이라 했는데 그것도 결국 눈이 없고 힘이 없고 사랑이 없는 공포와 불안과 절망이라는 말이군요.

김 = 우리 고구려는 정말 강하고 높은 나라였다고 봐. 고구려 유적이나 무덤을 보면 강한 기상과 높은 문명을 이룩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지. 그래서 고구려야말로 우리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그런 나라지. 그런데 그만 신라가 잘못을 했어. 신라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나라를 쳐들어갔어야지. 결국 우리는 삼국이 통일되지 못하고 대동강 이남의 아주 작은 약소국이 되고 말았잖아. 그래서 감옥에 갇힌 꼴이 되어 아까 말한 절망이 되고 말았지.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잇겠다고 나왔지만 왕건은 징기스칸 같은 그런 인물이 못되었어. 그래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지도 못하고 체제가 약한 약소국으로 남아서 결국 가장 불안한 시대를 겪게 되었지. 그 다음에 이성계가 나왔는데 이성계도 한때는 중원을 차지해보겠다는 그런 꿈을 가졌지만 그도 결국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는데도 급급한 형편이 되고 말았지. 그래서 임진왜란이니 병자호란이니 하는 전란을 겪어야 되는 공포의 시대가 되었지. 그리고 저마다 잡아먹겠다고 당파싸움이 나왔어. 그래서 서울 이북의 소출은 중국이 가져가고 서울 이남의 소출은 왕과 관리들이 먹고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게 되었는데 이렇게 빛이 없고 힘이 없고 생기를 잃은 시대가 되니까 결국 왜놈에게 먹히고 만 거야.

그러나 이런 허무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백성들의 민중의식은 깨나기 시작한 것이지.

심 =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사흘 후에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결국 이것이 우리나라의 시작이요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3·1운동의 뜻도 절망과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 빛과 힘과 생명이 삼위일체가 되는 통일과 독립과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갑작스런 8·15 해방을 맞이한 이후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6·25라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지금까지 분단 상태로 있는데 왜 이렇게 우리 역사는 고난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지요? 함석헌은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했는데 선생님은 우리 역사의 앞날을 어떻게 보시는가요?

김 = 그러니까 우리 역사는 지난 1500년 동안 계란상태로 살아온 것인데 비로소 3·1운동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거지. 우리 대한민국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인데 왜 이런 격변을 겪는가 하면 태어나는 진통 때문이야. 어린애가 나올 때 머리부터 나오면 순산인데 다리부터 나오면 난산이잖아? 우리나라가 태어나는 과정은 다리부터 나온 난산인 거지. 머리라는 통일부터 나왔으면 좋은데 다리부터 나온 거야. 3·1운동이 나온 것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란의 고통 속에서 나온 것이요 8·15도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나온 거니까 대란이 결국 산고의 고난이지. 결국 전란(戰亂)의 ‘난’이나 고난(苦難)의 ‘난’은 같은 것이야. 그래서 나는 이 두 가지 뜻을 겹쳐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난산이라 해.

8·15 해방으로 우리가 다리라는 자유는 얻었는데 몸통과 머리는 아직 나오지 못했지. 그래서 몸통이 나오기 위해서 겪었던 고난이 6·25라는 것이야. 6·25를 동란이라 하지만 그것도 어찌보면 세계전란이지. 유엔군과 소련 중공 북한이 싸운 것이니까 이것도 세계대란이라 할 수 있지. 이런 대란을 겪으면서 그 진통으로 나온 것이 독립이라는 몸통이야. 그런데 아직도 머리가 나오지 않았어. 머리가 나와야 통일인데 아직 통일이 안 된 거야. 그래서 앞으로 통일이 되려면 또 한번 대란의 진통을 겪어야 돼. 그 대란이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 지금까지 50년이 넘게 기다렸는데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있어야 될지 모르지만 느낌으로 별로 멀지는 않은 것 같아.

심 = 평화통일의 희망은 없나요? 공산주의란 무엇인가요?

김 = 철학적으로 공산주의 이론은 사회주의와 유물변증법이야. 유물이란 물질이라는 말이요 변증법이란 움직이고 변한다는 뜻이지. 그래서 이 둘을 합하면 움직이는 물건, 동물이야.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무자비한 폭력혁명이라야 된다는 것이지. 결국 공산주의의 본질을 직관해 보면 포악한 동물, 즉 호랑이나 늑대 같은 사나운 동물로 상징할 수 있지. 그러니까 공산주의와는 평화회담이니 평화통일이니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거야.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겠어? 늑대나 호랑이와 같이 손잡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남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야지. 원자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원자탄으로 위협하면서 내려오겠지. 그때 우리가 힘을 합쳐 힘껏 싸우면 세계가 도와줘서 이겨낼 거야. 우리는 이라크 같은 나라와도 다르지. 우리 문제는 세계가 해결해주지 무슨 미국이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야. 우리 운명은 미국이 결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모두 힘을 합쳐 해결해주는 것이지.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가 통일이 되는 것이지 미국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낙관하지.

심 = 인생의 문제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라는 실존적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요?

김 = 그 해답으로 하이데거는 시간성(時間性)을 말했지. 시간성이란 계란이 병아리가 되는 방법이야. 계란이 병아리가 되는 데는 21일이 걸리지. 시간이 이렇게 정해져 있어. 이것을 동양에서는 시간제단(時間際斷)이라 하는데 흘러가는 물을 끊어서 댐을 쌓듯이 시간을 끊는 것이야. 그래서 어미닭 품에서 계란이 자꾸 변화되면 이것을 시간성숙이라 하지. 나는 이것을 몰두라 해. 몰두하지 않으면 성숙이 되지 않거든. 이렇게 몰두하다 21일이라는 시간이 되면 딱 깨나는 순간이 와. 이렇게 딱 깨져 나오는 순간을 시간초월이라 하지. 그래서 시간을 초월해서 새처럼 하늘에서 사는 세계, 그것을 영생永生이라 해. 계란으로 오래 사는 것을 장생長生이라면 어미닭이 되어 하늘을 나는 그런 삶이 영생이야. 그러니까 장생이 지옥살이라면 영생은 하늘살이지. 장생이라지만 계란이 오래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인생을 100년을 산다면 장수한다고 하지만 시간으로 보면 백년도 순간이야. 예수는 33세에 죽었지만 지금도 예수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노자는 이것을 ‘사이불망자수(死而不亡者壽)’라 했지.

우리 현실로 말하면 경제계획 정치혁신 문화창조로 복지사회를 이뤄야지. 그것을 해 내는 것이 나라로 말해서 시간성이야. 나라살림의 경우에도 반드시 시간을 정해놓고 노력해야지 그저 경기가 좋아질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아.

사색이라는 것도 시간성이야. 12년을 정해서 매달 한권씩 내겠다고 정하고 시작한 거야. 매달 사상가들을 소개하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시간 성숙이 되고. 마지막 그달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나오면 그것이 시간초월인데 그것을 권두언으로 했지. 그래서 모두 144개의 권두언을 모아 책으로 냈는데 그것이 ‘생각 없는 생각’이야. 이것을 또 당시에 이화대학 학생이었던 미국의 최화자교수가 영어로 번역하고 성균관대학교의 이명섭교수가 편집해서 ‘Thought beyond Thought’라는 책을 냈는데 잘 되었다고 해.

심 = 그럼 종교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김 = 종교의 핵심은 두 가지야. 먼저 근본경험이지. 근본경험이란 무슨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인데 기독교로 말하면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그런 경험이야. 그런 근본경험이 된 후에야 바울이 되는 것이거든.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 가장 유명하지. “내가 있어서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서 내가 있다.”는 말이지. 이 근본경험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 근본경험을 가진 다음에는 도라는 것이 나오지. ‘중용’에서 말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이 근본경험인데 그 다음은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라는 것이지. 도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내가 유영모 선생에게 배운 도라는 것은 일일(一日) ‘일식(一食) 일좌(一坐) 일언(一言) 일인(一仁)’이지. 나도 35세 되는 3월 17일 근본경험을 하게 되고나서 매일 이 4가지를 실천한 거야. 근본경험이라는 견성(見性)과 도를 실천하는 수도(修道)야. 행복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런 도의 세계를 사는 것이 행복이야. 도를 통해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돼. 그리고 이런 행복을 남에게 전하는 것이 교라는 것,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라고 하지. 그래서 나는 종교의 핵심을 행복이라 해.

달마가 죽게 되었을 때 우는 제자들에게 얼마를 더 살았으면 좋은가 달마가 물었지. 그래서 찰나를 살았으면 좋겠다는 제자에게는 골수를 얻었다고 했고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다는 제자에게는 피를 얻었다고 했어. 핵심은 이것이야.

심 = 우리 모두가 성경만이 아니라 불교나 유교를 알아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김 = 나를 알기 위해서지. 원효를 모르고서 나를 알 수가 없고 퇴계를 모르고서 나를 알았다 할 수가 없지. 원효가 내 뿌리요 퇴계가 나 자신인데 원효나 퇴계를 모르고 어떻게 나를 알겠는가. ‘너 자신을 알라’ 했잖아.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알아야 되지. 나 자신이 누군가 하면 그것이 원효요 퇴계요 다산이지.

심 = 선생님께서는 35세에 근본경험을 체험하신 후 지금까지 50년을 한결같이 경전과 고전을 강의하시는데 그 의미를 여쭤보겠습니다. 왜 그렇게 고전을 강조하시는지요?

김 = 고전이라는 책을 보지 않으면 우리 생명이 살아나지 못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거야. 내 속 생명, 내 정신을 깨워주는 것은 역시 고전이지. 고전이란 2000년 3000년 된 책인데 그렇게 오래 가는 것은 살아있는 글이기 때문이야. 그런 글이니까 앞으로 만년도 살아가지. 우리는 그런 산 글을 봐야지.

심 = ‘논어’ ‘맹자’니 ‘노자’ ‘장자’니 하는 동양의 경전들은 모두 위정자들이 따라야할 정치철학이라 보는데요.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을 해 주시죠.

김 = 정말 사서삼경이니 노장이니 모두 정치철학이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위정자가 되는 세상이니까 그들은 이런 경전들에 대해서는 일체 몰라. ‘대학’이니 ‘중용’이니 모두 어떻게 하면 나라를 바로잡느냐는 그 정치철학인데 그것을 모르고 정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요새 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한 주일에 사서삼경을 다 볼 수 있거든. 끼리끼리 권세를 마음대로 할 생각이 아니라 고전을 읽고 나라를 바로잡을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어. 플라톤 같은 서양고전도 좋지만 우리에게는 동양고전이 제일 맞으니까 동양고전을 읽고 우리에게 맞는 말들을 좀 알게 되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되면 정말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지.

심 = 앞으로 대란이 올 것이라 하셨는데 이런 어지럽고 힘든 세상 속에서 보통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여쭤보겠습니다.

김 = 언제나 ‘선생님’을 붙잡고 사는 수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해. 선생님을 붙잡아야 내 소질을 발견하게 되고 내 소질을 키워갈 수 있거든. 역시 견성을 해야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될지 알게 되지. 그러니까 선생님을 만나야 내가 눈을 뜨게 되고 선생님을 만나야 내가 힘을 얻게 되고 선생님을 만나야 내가 날 수 있게 되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면 안 된다고 봐. 내가 행복하게 된 것은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지.

심 = 요즘 정치권에서는 과거사를 정리하자는 말이 많은데요.

김 = 우리의 과거는 천오백년 동안 비참했던 과거지. 계란처럼 힘도 자유도 없이 속국처럼 살았는데 3·1운동으로 의식이 깨고 8·15 해방이 된 거야. 그러니 이제 우리는 과거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봐야지. 선진국이 되는 꿈을 가져야지 과거만 들여다봐야 뭐하겠어. 친일파라 욕해봐야 다 죽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우리가 과거를 알아야 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야.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 과거에서 힘과 지혜를 얻고 앞으로 어떻게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름답게 키워야 되는지 그런 연구를 해야지. 과거에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과거의 고전에 깊이 통해서 거기서 정치철학을 얻어가지고 우리도 한번 이상세계라는 새로운 시대가 나오도록 해야지. 대통령이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믿고 우러러보는 그런 사람이 나오고. 그래서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몰두하면 우리의 앞날은 한없이 밝지. 물론 앞으로 난산의 진통으로 싸움이 한번 있으니까 그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도망치면 안돼. 싸워 이겨야지. 나는 우리의 미래를 굉장히 낙관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앞날은 양양해. 우리는 22세기에 가장 높은 문화국으로서 세계 역사의 주역이 될 거야. 내가 지금 성경 강의하는 것은 지금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22세기를 위해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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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호·심중식 교수는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85) 전 이화여대 교수와 심중식(沈重植·47) 한국산기대 겸임교수는 심 교수가 서울대 공대에 재학중이던 1970년대 말 김 교수가 12년동안 발행하던 개인잡지 ‘사색’을 보고 이화여대 교회를 찾아가 강의를 들으면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김 교수는 황해도 서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28세 때 월남, 1948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다석 유영모(柳永模·1890~1981)를 만나고 6년간 사사하며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 목사이면서도 유교·불교·도교·기독교를 깊이 탐구하는 12년의 수행 끝에 각각의 사상에 담긴 깊은 뜻을 궤뚫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양의 사상과 다양한 종교를 넘나들면서도 하나의 원리를 설파하는 사상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매주 일요일마다 이화여대 교회에서 동양고전과 성서를 강의하고 있다.

심 교수는 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종교와 동양철학, 사람됨의 길이 무엇인지 배우게 됐다. 도서출판 사색의 이충국 사장 등 다른 제자들과 함께 김 교수의 강의를 녹취해 ‘김흥호 사상 전집’을 펴내고 있다. 스승인 김 교수의 삶과 사상을 알리기 위한 홈페이지(www.naalla.com) 운영에도 참여하고 있다.

(정리=심중식 교수)

(조선일보 2004-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