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이 합법적이라니...

얼마 전에 국내의 한 저명한 소설가가 언론과의 대담중 ‘한일합방 합법’ 발언을 했다. 비록 그가 과거사와 관련한 얘기를 하던 중에 ‘특별한 의미’ 없이 지나가는 말로 했다 할지라도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국제법상 조약이 합법적으로 성립되는 가장 본질적인 조건은 당사자간의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이다. 이 정신에 위배되는 어떠한 조약도 법률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점의 전초가 된 1905년의 이른바 을사늑약은 바로 이러한 원칙에 위배된다. 을사늑약은 전형적인 강박에 의한 조약으로 국제법상 원천 무효이다.

당시의 관습국제법에서도 강박에 의한 조약은 불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 국제법학회의 의뢰에 따라 1935년 하버드대 법대가 기초한 조약법 초안인 ‘하버드보고서’ 제32장에도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조약에 서명· 비준·승인하는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강압이 가해지는 경우 그 조약은 성립되지 않는다면서, 이러한 강박에 의한 조약의 대표적인 예로 1905년의 이른바 을사늑약을 들고 있다. 하버드 초안을 기초로 1963년 유엔 법사위원회가 작성한 국제법의 법전화를 위한 보고서도 제35조에서 국가 대표에 대한 개인적 강압이 있는 경우, 설사 동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법률적 효력이 없음을 명문화했으며, 1969년에 채택된 빈(비엔나) 조약법협약에서도 강박을 조약을 무효화시키는 대표적 원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을 위한 일련의 절차는 당시에도 인정되던 국제법의 기본적인 원칙을 송두리째 무시한 불법 행위였다. 이른바 을사늑약이 극심한 강박에 의해 체결됐다는 것은 당시 조선 측뿐 만 아니라 일본 측 자료에도 잘 나타나 있다. 더욱이 을사늑약은 현재 보관돼 있는 양측 원본에 조약 명칭이 들어가 있지 않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어서 ‘소위’ 을사늑약이라고 불리는 미완성의 문서인 것이다.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를 인식한 일본은 1907년 정미7조약의 체결을 위해 국새를 탈취하고 황제의 서명을 위조하는 등 공작을 벌인다. 이렇게 체결된 정미7조약도 앞서 체 결한 을사늑약과 마찬가지로 조약 대표의 위임장이나 황제의 비준서를 포함하여 조약 체결을 위한 핵심적인 요건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그와 함께 정미7조약 직후 공포된 일련의 법령 원문에서도 황제의 서명이나 국새가 빠져 있거나 두 번 찍히는 등 실수로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일본의 한국 강점 과정이 ‘국제법상 합법적’이었다고 하는가? 이는 명백히 힘에 의한 강제 국권 침탈이며 군사적 강점이었다.

국제법적 관점에서 식민지라는 말은 일본이 사용할 용어일 뿐이다.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에도 고종 황제는 1906년 1월 을사늑약 무효 선언과 열강에 대한 공동보호 요청을 위한 국서를 발표했으며,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의 조치로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호소했다. 그 뒤에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순간까지 우리 민족은 나라 안팎에서 계속적으로 뜨거운 독립 투쟁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프랑스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 자유프랑스나 레지스탕스가 히틀러나 나치의 핵심 인물들에 대해 윤봉길이나 이봉창 같은 의거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불거진 고구려사 문제에 이어 간도 영유권 문제로 한·중 사이에 ‘역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역사가 있다면 지금 부터라도 바로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먼 훗날 자칫 ‘우리것’ 마저도 잃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중 /동국대교수,국제법>

(문화일보 2004-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