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협약

백두산 동쪽 두만강 이북의 간도(間島)는 우리 민족의 오랜 뿌리가 박힌 비극의 땅이다.

간도는 원래 옥저의 땅이었다가 이후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가 되었는데 이 곳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때였다.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농민들이 관권이 미치지 않는 간도에 들어갔고, 당시 함경도 지방에 대흉년이 들면서 이 곳은 새 삶의 터전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항일운동의 전초기지가 되면서 이주자들이 크게 늘어나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2만5천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의 간도이주가 활기를 띠면서 1926년에는 전농토의 절반 이상이 우리 소유였다.

이러한 간도는 일본이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만주지방의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얻을 요량으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준 것이다.

남북이 갈려있는데다 중국과의 여러 사정으로 애써 침묵해 오던 간도문제가 큰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여야의원들이 최근 '간도협약은 무효이며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엊그제는 조선통감부가 작성한 지도에서 간도가 한국영토임이 입증돼 영토를 둘러싼 영유권다툼은 고구려사 왜곡사건과 맞물려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는 것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일본 등 인근 국가들은 자국의 영토권에 대해선 한치 양보없이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간도에서 보듯 소홀히 다뤄졌던 게 사실이다.

1983년 국회에서 "백두산 영유권 확인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한 것이 고작이다 .

영토문제는 국가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사안이어서 신중하게 다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엄연한 우리 땅이 다른 나라에 점유되어 있는데도 방관만 하고 있다면 이 또한 우리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한국경제 / 박영배 논설위원 2004-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