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덩샤오핑이 말하기를

지금은 평범한 현대사의 한 토막이 됐지만 1971년 죽의 장막 뒤에 있던 중국이 국제무대 전면에 나서면서 세계에 던진 파장은 컸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중화민국(타이완)을 쫓아내고 유엔의석과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했다.

중국은 미소 패권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제3세계의 대변자 노릇을 자임했다.

세계는 환영, 충격, 경계심이 혼합된 반응을 보였다.

1974년 유엔총회에 중국대표로 참석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연설은 이런 국제 시선에 대한 중국의 대답이었다.

“만일 중국이 어느날 낯빛을 바꿔서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 패권국가를 자처하며 곳곳에서 다른 인민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인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한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이 연설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특이한 국가책략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바꿔치기 하는 것을 보면 덩샤오핑의 말이 참으로 미묘하게 느껴진다.

덩샤오핑의 선배이자 중국 공산당정권의 제2인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 는 일찍이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역사가 아님을 밝힌 적이 있다.

1963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에게 “조선 민족의 발자취는 랴오허(遼河)와 쑹화(松花)강 유역 및 투먼(圖們)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이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많은 문제가 불공정하게 씌어졌다”고 말했다.

설훈 전 국회의원이 중국에서 찾아낸 문서에 담긴 내용이다.

우다웨이 중국외교부 부부장의 한국방문으로 고구려사 분쟁이 한 고비를 넘긴 듯하다.

그런데 새삼 위에 소개한 두 사람의 어록이 뇌리를 스치는 것은 역사문제를 포함하여 중국관계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고구려사 분쟁을 놓고 거대한 바위처럼 막아선 중국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때 그나마 효과적인 수단이 중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하는 홍보전략이다.

중국은 지금 국제사회에 팽배해가는 '중국위협론'을 해소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저우언라이의 역사 쇼비니즘 비판과 덩샤오핑의 패권주의 비판은 중국과의 고구려사 협상에서 좋은 무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모르긴 해도 중국이 우다웨이 부부장을 서둘러 보내 고구려사 분쟁을 조기 진화한 것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역사 패권주의를 규탄하고 나선 데 대한 당혹감의 표출일 것이다.

중국정부는 아마도 2년 전 여중생 사망사건을 미숙하게 처리함으로써 반미감정을 촉발한 미국의 외교적 실책을 잘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발이 전부일 수 없다.

우리도 분명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최근 중국을 다녀온 인사들이 "한국이 왜소해진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한다.

우리의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중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좋은 관계설정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 대미 및 대중관계의 변화를 보면 우리의 정서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것이 가이어 주한 독일대사가 지적한 ‘한국의 외교적 고립’과 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중요한 것은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국가발전과 중국과의 관계발전은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특히 북핵문제는 물론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국의 대외전략이 물려있다.

역사문제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현명하게 설정해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가 피력했던 역사인식은 중국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이용할 하나의 촉매가 될지 모른다.

(한국일보 200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