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코벨의 '한국문화 탐구' <19> 백제의 칼 칠지도

백제의 칼 칠지도와 千寬宇

1984년 9월 말, 사학자 천관우 선생과 본인, 그리고 본인의 아들 알란 코벨은 한국일보 건물에 있는 천 선생 사무실에서 한시간 남짓 한국고대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세사람은 기마족들이 일본에 들어갔다는 기본적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 시기가 언제이며 어떤 방편이 쓰였는지는 오사까-나라지역 일본왕들의 고분이 발굴되지 않는한 확인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100퍼센트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 나라 고분발굴 허가를 얻어내기는 ‘최근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히로히또 일본왕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로 보인다.
  
천관우 선생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천 선생은 진구고꼬(神功皇后)를 일본에서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쓴 사가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본인과 알란 코벨은 최근 출판된 본인의 저서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책 한권을 천 선생께 증정하였다. 이 책에 자세히 나와있는 진구(神功)의 일생과 그녀가 어떻게 해서 서기 369년 바다 건너 일본땅을 정벌하러 기마군단을 이끌고 나섰는가를 천선생이 이해해 주기 바래서였다. 천선생은 또한 우리에게 한일 고대사에 관한 당신의 저서를 증정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일개 여성이(당시에는 무녀왕녀였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정복군을 이끌고 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 한다. 그러나 일본사서에 나와 있는 대로 그 성격을 분석해 보면 당시 그같은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주자학이 그토록 강세를 떨치기 이전 지도자가 된 한국인 여성은 여러 명이 있다.  

 
일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에 소장된 칠지도 전체사진 및 명문이 새겨진 부분. 칼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어 그 근원도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이 칼이 백제로부터 신공왕후에게 내려진 하사품임을 밝혀놓고 있다. 부여박물관에 복사품이 진열돼 있다. 길이 74.5센티. ⓒ프레시안  
우리 세사람이 완전히 동의했던 사실- 일본 신또(神道)에서 가장 신성한 보물로 여겨지는 이소노가미(石上)신궁 소장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
  
맥아더장군은 일본에서 신또신앙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자이바츠(財閥)를 못 없앤 것처럼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날 일본재벌은 완전히 되살아났으며 신또에 대한 외경은 ‘살아있는 신’으로서 일본 왕가에 대한 경배로 나타나고 있다.
  
이세신궁에는 그 옛날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이 일본왕가에게 왕권의 표시로 내려주었다는 동경이 소장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동 거울은 일본, 한국, 중국에 수없이 많은 물건이지만 과거 고대 한국인들의 일본 거주지 아스카 부근 이소노가미신궁의 칠지도만큼은 유일한 것이다.
  
일본에서 어느 누구도 이 신성한 칼을 절대 볼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렇지만 한국 부여박물관 중앙전시실에 이 칠지도의 모사품이 전시돼 있다. 부여박물관이 일본에 요청하여 정확한 모사품을 만들어 왔는데 그 이유는 칠지도 칼등에 금으로 새겨진 ‘백제 왕세자’란 글짜 때문이다. 아마도 ‘금상감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 명기된 연대는 서기 369년을 가리킨다.
  
이 칠지도는 이곳에 단 하나 뿐으로 한국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칠지도의 명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일합방 기간인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이 칼의 명문은 의도적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369년의 연대에는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천관우선생이 이 칠지도의 한자명문을 읽어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 칠지도는 이를 지닌 사람에게 어떤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피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를 속국의 지배자에게 보낸다(즉 속국에게 선물을 만들어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뜻).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이를 만들었다”
  
물론 일본의 모든 학자들은 이 명문에 나와있는 ‘속국’을 일본이 아닌 백제로, ‘지배자’를 야마도왕국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대 그럴수 없는 명백한 이유는 바로 서기 369년 백제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점에 올라있던 때였다는 사실이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평양을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 당시 일본사회는 아주 미약한 상황에 지나지 않았으며 무녀왕녀인 진구고꼬와 그의 군사,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심가들이 막 속국을 건설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천관우선생은 중국기록에 나온 백제항목을 펴보였다. 그 기록에는 당시 백제가 5개의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일본은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일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 ⓒ프레시안

이 비범한 칼이 어떻게 돼서 왕실의 장막 뒤에 가려져있게 되었는지, 칼은 왜 7개의 곁가지가 달려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아무 설명도 할 수가 없지만 1983년 한국무속에 관한 두 권의 저작을 낸 나의 아들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경주출토 금관은 모두 7개의 가지를 주요 장식으로 지니고 있다(한두개 금관은 9개 가지를 지녔다). 이 장식은 무속에서 말하는 ‘우주수목’을 나타내는 것이며 7개의 곁가지는 시베리아 전역에서 부족에 따라 신앙대상이 되는 무속의 7천(天)세계, 혹은 9천(天)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높은 신격일수록 높은 자리에 깃들인다는 것이다.
  
백제의 칠지도나 7개 내지 9개 가지를 지닌 신라경주출토 금관은 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전, 위로는 왕에서부터 군신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속신앙을 믿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들의 종교 샤머니즘을 ‘민간신앙’이라고 격하시킬 이유가 없다.
  
당시의 샤머니즘은 매우 강력한 힘이었고 가장 뛰어난 장인들이 이 땅에서 나는 풍부한 금을 가지고 생전에나 죽어서나 무속의례의 집전자인 왕을 위한 갖가지 금장신구를 만들어냈다. 20세기의 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그 때문에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720년 나라의 왕실에서 제작한 일본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칠지도가 서기 372년 신공왕후에게 전해진 백제의 하사품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720년까지 350년의 세월동안 일본은 문자기록이란 걸 갖지 못한 때였으니 연대가 3년 빗나갔다 해도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어보인다.
  
우리는 이 칠지도가 백제 왕세자(전장에 나가있던 부왕 근초고왕을 대신해; 근초고왕은 그후 얼마 안 돼 사망했다)로부터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러 나선 신공왕후에게 장도를 축하하는 뜻으로 하사된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3년후인 372년 신공의 장거가 성공했음을 축하하는 뜻에서 내려진 선물이라고 믿는다.
  
<원문 Horserider Exponents agree, Disagree 코리아 헤럴드 1984.10.3>

존 코벨 / 김유경 편역 

(프레시안 200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