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경기> 고구려로 떠나는 역사기행(상)

고구려 최대 군사 유적지..구리시 아차산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 능선의 한 봉우리에 있는 아차산 고구려 제4보루(堡壘)는 발굴되기 전까지 하나의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97년부터 98년까지 구리시 의뢰로 서울대학교박물관이 아차산 제4보루를 발굴함으로 등산객의 발에 밟히던 돌무더기는 살아있는 고구려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발굴조사단은 "아차산 제4보루는 남한에서 발굴된 최초의 고구려 군사요새로 학술적인 가치는 말할 나위 없이 역사교육의 자료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아차산은 고구려가 5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차지하던 시절 백제와 대치하던 최일선 전선에 해당한다.

보루란 전선 고지에 설치된 부대 주둔지. 지금으로 치면 휴전선 OP에 해당하는 곳으로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봉우리 정상마다 설치된 15개 보루 자리가 남아있다.

아차산 보루는 특히 한강 건너 백제 기지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와 대치하던 고구려 부대 최일선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아차산 일원은 의정부와 양주 등 경기북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 봉우리에 해당하고 산줄기 좌우에 중랑천과 왕숙천을 낀 넓은 평지가 분포한다.

이러한 지형적 요인을 고려하면 고구려군은 먼저 아차산 줄기를 따라 전초부대를 투입해 교두보를 확보한 뒤 좌우의 평지로 주력군을 이동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까지 진군한 뒤 50∼100여년간 아차산 일원에 주둔하며 백제와 한강을 사이에 놓고 대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차산 제4보루는 해발 285m 봉우리에 축조된 군사유적으로 봉우리를 중심으로 성벽을 쌓고 내부에 주거시설을 만든 독립된 작은 성곽 형식을 갖추고 있다.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단에 해당하는 봉우리에 둘레 210m 가량의 타원형으로 높게는 20여단 석축이 쌓여졌고 병사들이 거주했던 건물지 7곳, 온돌 13기가 확인됐다.

이곳 제4보루에서는 고구려 토기 26종 538개체와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를 포함한 철기류 319점 등 유물 약 1천500여점이 출토돼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임시보관 중이다.

이와같은 온돌구조와 거주지 공간 구획, 출토된 무기류 등으로 추정할 때 제4보루에는 10명 단위의 고구려 부대편성 최소단위 10개 부대 정도, 즉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을 것을 추정됐다.

아차산 제4보루는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 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고구려의 남하과정, 한강유역에서의 대치와 관리방식,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과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이 귀중한 고구려 역사자료 아차산 제4보루는 능선의 봉우리에 위치 해 있어 현재는 등산객들의 발길에 채이는 등산로의 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고구려 유물 1천500여점은 고구려 역사 논쟁이 뜨거운 요즘도 서울대학교박물관 창고에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다.

경기도와 구리시는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과 아차산에 산재한 보루 등 유적을 근거로 아차산에 고구려 역사 연구의 요람이 될 고구려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구리시 계획에 따르면 박물관은 부지면적 2만㎡, 건축면적 6천㎡ 규모로 유물전 시관, 교육관, 향토관, 야외전시장, 역사현장 탐방코스 등으로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아차산 고구려 유적은 남한에서 정식 발굴된 최초의 고구려 유적으로 고구려 연구의 중심이 되는 등 중요성이 이미 인정되고 있어 아차산에 고구려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더욱 중국은 고구려사 왜곡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저의를 드러내 민족사적 측면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는 한민족 역사임을 선포하는 의미로도 고구려박물관 건립은 지체할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다.

역사는 역사를 인식하는 민족의 소유가 된다.

경기도는 후대로부터 고구려 역사를 잘 지킨 선조였다는 평을 듣겠다는 각오로 고구려박물관 건립과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의 국가 사적지 지정을 중점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두호 기자 2004-9-2)

<관광경기> 고구려로 떠나는 역사기행(하)

임진강 고구려 戰線..천혜의 요새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농로를 한참 따라가 찾아낸 임진강변 호로고루(瓠蘆古壘)는 우선 규모에서 놀라게 했다.

높이 10m, 길이 80m에 이르는 성은 잘 다듬어진 컴퓨터 본체 정도 크기의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다.

임진강은 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강변의 대부분이 단애(斷崖), 즉 절벽을 이루고 있다.

호로고루는 이러한 임진강의 본류와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만든 쐐기모양 의 뾰족한 단애지역의 평지로 연결된 한 변을 성으로 막아 삼각형의 성을 만든 것이다.

평지에 쌓은 성은 높이가 10m이지만 삼각형 성의 나머지 2변에 해당하는 임진강 단애는 20∼30m의 절벽으로 천혜의 요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삼각형 성의 남벽이 162m, 북벽 146m, 성이 쌓여진 동벽은 93m로 호로고루 둘레는 400m 정도이고 성 내부 면적은 1천600평 정도에 이른다.

호로고루가 있는 임진강 유역은 남북이 대치한 지금도 곳곳에 탱크 진지가 구축 돼 있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전선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탱크에 올라 있는 오늘날의 병사와 1천500여년 전 호로고루 성벽에 기대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을 고구려 병사가 묘하게 오버랩 됐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호로고루는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히 결합해 축성이 쉬우면서도 견고한 구조를 이루게 한 것으로 고구려 축성 기술의 걸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토기와 기와 등의 출토층을 감안하면 고구려군은 성이 축성되기 전부터 주둔했고 5세기 중엽 축조한 뒤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는 7세기 중엽까지 약 200여년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당포성도 호로고루와 마찬가지로 임진강 본류와 지류에 의해 형성된 단애지역 삼각형 지형의 평지로 연결된 한 변을 성으로 막은 구조다.

돌을 쌓아 만든 성은 높이 6m, 길이 50m로 호로고루에 비해 규모는 작다.

현재 성의 발굴이 진행중이어서 성벽 일부는 절개돼 노출됐고 성 위에는 나무 한그루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국방유적연구실 발굴조사에 따르면 당포성의 축조방식, 출토유물 등으로 미루어 처음 성을 쌓은 것은 고구려 군이었고 한동안 사용하다 신라가 한강 이북을 점령하며 다시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강 유역에는 이밖에 하류지역의 봉서산성, 장산진, 덕진산성, 중류의 호로 고루, 두루봉보루, 육계토성, 칠중성, 상류의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군자 산성 등 20여개의 고구려 성이나 진지 등 군사유적이 남아있다.

이곳 임진강 유역이 삼국시대 고구려-백제, 고구려-신라가 대치하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호로고루, 당포성 지역은 개성 지역을 통과한 고구려군이 임진강을 배를 타지 않고 건너 백제 수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코스에 해당한다.

임진강 요새 남쪽으로 산재한 양주 천보산 불곡산 보루, 구리 아차산 보루가 모두 고구려군이 백제 한성으로 향하는 이동로와 일치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로고루는 그 중에도 삼국시대 주요 건물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이 대량 출토되는 점, 축성 규모가 크고 치밀한 점, 지정학적 비중이 높은 점 등을 고려할 때 임진강과 한강 유역의 많은 고구려 보루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호로고루 성은 발굴이 중단된 탓으로 성벽 전체가 검은 색 햇빛가리개로 덮여 있어 흉물스럽고 성안에는 토지 소유자가 버섯재배사 7동을 지어 유적을 훼손하고 있다.

당포성도 발굴이 진행중이지만 절개된 성벽의 보존 장치가 없어 성돌과 토사가 비에 쓸려내리고 있다.

고구려사가 우리 한민족 역사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대는 지금도 우리는 고구려 역사를 증명해줄 중요한 유적을 팽개쳐 놓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와 연천군은 이들 임진강변 고구려 군사유적에 대한 발굴과 보존대책을 서둘고 있다.

경기도는 2000년 호로고루, 2003년 당포성을 각각 경기도기념물로 지정, 훼손을 막고 사유지를 수용할 근거를 만든데 이어 현재까지 발굴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경기도는 또 도내 고구려 유적들이 고대사 연구 뿐 아니라 역사 관광지로의 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고 이들 유적에 대한 정밀지표조사와 발굴, 그리고 보존을 계속 한다는 방침이다.

(연합뉴스 / 박두호 기자 200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