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한국

고구려로 인해 한동안 시끄러웠다. 외교문제가 될 정도로 번지나 싶더니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이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의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서 흥성한 민족은 늘 중국 중원을 점령했다. 몽골, 거란, 여진, 만주 등등. 송대 이후로 중원의 역사는 이들 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중국은 늘 이 지역과의 관계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중국 동북지역은 늘 중원을 향한 비수와 같은 곳이다. 동북지역을 개발하려면 다양한 자본이 모여야 한다. 만주국을 세워 이 지역을 지배했던 일본으로서는 친숙한 땅이다. 고구려와 발해를 동일 민족의 국가로 믿는 한국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다. 더군다나 수많은 조선족이 그 일대에 살고있고, 북한이 바로 이웃해 있다.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일대에는 적잖은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중국 정부는 그것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국의 사정이다. 우리에게 고구려는 혹은 그 지역은 어떤 곳인가.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통일신라 이후 우리는 한반도 안에만 머물렀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고려 또한 압록강을 넘지 않았다. 함경도를 자기 세력의 근거지로 삼은 이성계조차도 평양이 아니라 한양에 수도를 정했다. 고구려가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하지만, 우리가 고구려적인 삶을 잊어버린 지는 2,000년에 가깝다.

고구려를 지향한 세력은 우리 역사 속에서 계속 등장했다. 발해가 그랬고, 고려의 묘청이 그랬다. 가까이엔 신채호가 그랬다. 이들이 추구한 고구려는 한가로운 농업국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말 탄 전사들의 이미지에 가깝고 정착하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의 세계이다. 이들이 흥성하면 중원이 곧장 함락되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가 정말 고구려를 계승하려면 고구려적인 삶을 살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지금 고구려 옛 지역이 중국 영토냐, 한국 영토냐 하는 논쟁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처럼 보인다. 고구려적인 삶과 정신이 현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북방지역의 유목민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국경이 요동 벌판까지 확대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국경의 확장이지 국경의 초월은 아니다. 고구려의 자손이 되려면 국경을 넘어서야 한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닌지도 모른다.

<류준필 /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경향신문 200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