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4세기 한ㆍ중ㆍ일 전쟁사

전쟁의 발견 / 동아시아

사료의존 탈피 지휘관 심리등 전쟁요소로 재구성

중국의 고구려사ㆍ발해사 왜곡문제, 계속되는 일본과의 동해 표기문제로 조용할 날이 없다. 국가 체제가 정비돼 가는 4세기는 전쟁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료의 부족 때문에 제대로 각국의 역학관계와 진실을 파악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학계에서조차 전쟁사는 학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왔다.

소장 역사학자 이희진이 펴낸 `전쟁의 발견`(동아시아ㆍ1만2000원)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의 각축장이었던 고대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과 왜의 전쟁사를 전략ㆍ전술적 문제, 정치적 배경, 지휘관의 심리 등 당시 전쟁에서 작용했던 주요 요소들을 살핌으로써 복원, 재구성해낸 전쟁사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전쟁의 기록이 자국의 입맛에 맞게 기록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사료 의존적이었다"며 "일반적인 연구성과를 하나하나 의심하면서 과거를 확인하는 작업에 애썼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신라가 3세기 전반 이후 200년 동안 왜의 침략에 시달렸던 것은 약소국인 신라가 강력한 왜에 침략을 당한 것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왜의 신라 침략은 오히려 생명줄을 쥐고 있던 신라에 대한 압력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5세기 이후 국제정세가 복잡해진 다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전쟁은 외교를 위한 압력수단의 성격이 강했다는 주장이다.

4세기 중엽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고대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기다. 한국 고대사에서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활약하고, 일본은 `수수께끼의 시대`로 불릴 정도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한다.

4세기 중엽 일본의 신라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5만병력 동원설은 일본의 국력을 과장하는데 이용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저자는 당시 광개토왕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은 저항없는 정벌, 속전속결과 신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힘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린 전략이었다고 설명한다. 또 임나가라를 뒤탈없이 정리하는데도 전략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신라, 백제의 주도권 싸움에서 관산성 전투가 마치 장세변화의 계기였던 것처럼 이해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가야의 대부분이 신라에 흡수된 이후에도 백제, 신라 전쟁의 주도권은 백제가 쥐고 있었으며, 백제가 멸망한 것도 지배층의 분열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헤럴드경제 / 이윤미 기자 200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