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 코드로 세계미술계를 놀라게 하리라"

'2004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광주에서는 비엔날레에 앞서 색다른 전시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한 초청전시회 '동방의 빛(9월 8일부터 9월 15일까지)'이 그것.

광주 프랑스 문화원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고암 정병례 선생의 전각 40여 점이 전시되며, 9월 8일 오후 5시에는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프랑스 작가 6명을 비롯해 비평가 4명과 유럽의 문화예술관련자들 약 40여 명이 작가인 고암 선생과 만남의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한불수교를 기념해 열리는 이번 전시회를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각전으로 마련했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이것은 동양예술이 지닌 이색적인 느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고암의 전각이 가지는 현대적 미감과 다양한 장르를 통해 펼쳐지는 뛰어난 상상력이 프랑스인들에게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 갔으리라.

 
▲ 전각작품 - 삼족오
ⓒ2004 고암전각예술원 제공
 
낯선 이름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생소함, 서예도 아니면서 판화도 아니면서 새로운 예술장르로 어느 새 우리 곁에 바짝 다가선 전각예술. 고암 정병례는 그 자리를 외롭게 개척해 온 예술인이며, 이번 초청 개인전을 통해 그 외로움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 고구려벽화를 전각으로 표현한 작품 '춤'
ⓒ2004 고암전각예술원 제공
풍경소리의 깨달음을 새기는 고암

지하철역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만났을 것이다. '풍경소리'라는 그림과 글에 담겨진 삶의 의미들. 판 속의 풍경소리가 바빴던 마음을 고즈넉하게 적시면 문득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작은 깨달음.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안겨 주는 이라면 그는 이미 그것만으로 선지자일지도 모른다.

돌에 각을 뜨고 원을 그리고 길을 내는 일은 실질적인 작업만으로도 힘겨운 것. 거기에 상상력을 깃들이고, 철학을 담고, 인생의 의미를 풀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도의 세계이리라.

"전각의 작업은 곧 도를 깨치는 작업입니다. 전각을 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됐지요."

고암 정병례(58) 선생은 전각을 통해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있는 전각예술가이다. '方寸의 넓이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그가 전각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전각예술에 접어들기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젊음의 열정을 식혀가며 시작했던 친척의 인장포 일은 그에게 오히려 평생 걸어야 할 예술의 열정을 심어주었다. 전라남도 나주군 동강면 시골마을. 앞에는 영산강이 굽어 흐르고 뒷산에 오르면 월출산의 기운이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태생적 예술성이 그를 단순히 도장을 파는 기능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뚜렷이 잡히는 것은 없었지만 그는 둥글고도 네모난 도장의 공간 속에 뭔가 깊은 뜻이 있다고 믿었고, 그것의 실체를 반드시 알아내리라 자신과 약속했다. 그 후로 그는 서예를 배우고 전각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 공부했으며, 각법(刻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러기를 10년. 세월은 흘렀고 나름대로 그만의 전각 세계를 구체화시켜 나가던 중 1983년 전각예술가로서 길을 가도록 해준 스승을 만난다. 당시 한국전각가연구회장이자 전각의 대가 회정(懷停) 정문경 선생으로부터 전통 전각의 고법(古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전통전각은 작업은 물론이고 예술을 임하는 자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나가려면 과거와 전통을 알아라' 그는 과거와 현재, 미래는 공간 속에서 서로 맞물려 있음을 터득한다. 그래서 미래로 가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리를 전각에 그대로 접목시킨다. 제자들이 작업을 풀지 못할 때도 그는 가장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전각을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전각예술이란

전각은 칼로 돌과 나무, 금속 위에 문자를 새긴 다음 인주나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고 그 인영(印影)을 감상하는 것으로 낙관의 실용성과는 다르게 예술성을 갖췄다. 전각예술은 신석기시대 질그릇 문양에서 비롯돼 중국의 은나라, 주나라, 진∙한시대 인장의 모습에서 부드러운 석재를 발견한 이후에는 멋스런 문인∙문객들의 예술성과 조화를 이뤘다.

문자를 이용한 시각예술이자 회화적 조형성을 극대화시켜 획과 획, 선과 선, 점과 점 등을 자유롭게 재구성해 낸 문자조형예술이다. 물론 문자 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등 여러 가지 형상에서부터 추상적 조형까지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여기에는 작가의 체화된 철학이 담겨있어야 비로소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예술적 코드를 만들어라

고암은 작가라면 스스로 코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코드란 독자적인 예술세계이자 예술영역이다. 기능인은 정해져 있는 코드를 아주 잘 표현해내는 사람이며 예술가는 코드를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코드를 만든다는 것은 우주질서를 찾아내고 그것을 삶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그는 그래서 늘 자신만의 독창성을 찾아 연구한다. 그의 실험정신은 전각이라는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건축물에 전각 기법을 이용한 벽화를 그려 넣는다든지(거창문화예술회관), 전각을 설치미술의 영역으로까지(일야구도하기 一夜九渡河記, 샘) 확대하기도 한다. 또한 환경미술가, 대지예술가라고 자처하는 그는 산과 들판에서 자연친화적 작품을 퍼포먼스와 함께 펼쳐 보인다(헤이리 퍼포먼스).

2000년에는 ‘삶, 아름다운 얼굴전’을 열어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전각을 통해 '새기고 기록하는 행위를 통한 기억'으로서의 전각의 대중성을 풀어내 보이기도 했다. 

 
▲ 자신의 고향인 나주를 상징하는 전각작품. 나주시청 로비에 설치돼 있다.
ⓒ2004 고암전각예술원 제공
 
한국만의 독창적 코드로 세계미술계를 놀라게 하리라

그의 전각에는 문자와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구성하고 다양한 색채를 도입하는 등 고암만의 기법이 담겨 있다. 글과 그림이 조각의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2차원적 전각을 3차원적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장한다. "전각예술이야말로 삼라만상을 한번에 꿰뚫어보는 예술이며 동양예술의 핵"이라고. 전각을 '내 삶의 진정한 도구'라고 말하는 고암은 세계미술계를 놀라게 할 도구로 전각예술을 꼽으며 그 준비를 위한 긴 명상에 들어갔다. 

 
▲ 전각예술은 건축물의 벽화에도 활용할 수 있다. 거창문화예술회관의 외부 벽면도 전각작품으로 이루어졌다.
ⓒ2004 고암전각예술원 제공
 
30년 가까이 오직 전각예술에 대한 믿음과 열정 하나로 살아온 고암 정병례. 그는 '방촌(方寸)에 사나 이미 우주에 든’ 창조적 전각예술가로서의 길을 이미 오래 전부터 가고 있었다.

(오마이뉴스 / 권미강 기자 200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