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기원 BC2세기로 끌어올려야”

“백제는 한강 유역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다(B.C. 18). …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2003년)에 따르면 백제의 한강 유역 장악은 3세기 중엽에 와서 이뤄진다. 이전의 백제는 마한의 한 소국으로 간주될 뿐이다.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무시하고 중국 역사서 ‘삼국지’ 한조(韓條)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제의 식민사학이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7년에 시작된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기존 학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발굴이 진행중이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이라는 사실이 확실시되고 있다. 오는 9일 서울시사편찬위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초기 백제역사 새로 쓰기의 첫 시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는 서울시의 역사를 다루는 시사편찬위가 서울시의 역사를 600년이 아니라 2,000년임을 인정하려는 시도여서 관심을 끈다.

‘백제의 초기 국가형성과 위례성’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는 이종욱 서강대 교수는 미리 제출한 발표문을 통해 풍납토성의 발굴은 백제 건국설화와 위례성의 존재, 십제(十濟)와 백제의 건국주체 등 삼국사기의 기록이 결코 허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며 백제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의 기원을 앞당겨야 한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둘레 3.5㎞, 폭 43m, 높이 11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토성인 풍납토성을 마한의 한 소국으로 있던 백제가 축조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백제는 서기 200년 이전에 거대한 토성을 축조한 국력을 갖춘 왕국으로 성장한 것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최근의 발굴성과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첫 왕성인 위례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며 성 축조시기를 발굴단이 추정한 기원전 1세기보다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추정했다.

1997년 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동북쪽 토성 내벽의 시료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09년’이라는 중심연대를 얻었으나 위례성이 여러차례에 걸쳐 수축된 만큼 처음 축조된 위례성은 시기가 이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게 그 근거이다.

이교수는 이와 함께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한인(漢人) 호래 등 1,500명이 한(韓) 지역에 왔다 잡혀 노비가 되었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주목, 한인을 노비로 삼은 세력은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며 백제가 한강 유역을 완전 장악하던 시기도 3세기 중엽의 고이왕 때가 아닌, 기원을 전후한 시기 또는 그보다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 역시 ‘풍납토성과 한성백제’라는 발표문에서 풍납토성의 동벽·서벽, 건축유구 등을 들어 이 토성이 백제왕성인 위례성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풍납토성 축조 이후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한 백제가 북방세력을 대처하기 위해 몽촌토성을 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 평지왕성-배후 산성이라는 삼국시대의 왕성체제를 갖췄다고 설명했다.

이종욱 교수는 “한국사학은 일제가 발명한 역사 읽기의 틀을 유지하며 백제의 역사를 이야기해 왔다”면서 “풍납토성의 발굴 조사결과는 지난 100년간 지속되어온 백제초기 수백년간의 역사가 헛소리임을 드러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제 ‘삼국지’가 아닌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역사를 재구성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며 “백제의 역사 나아가 한국고대사의 앞부분 수백년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 / 조운찬 기자 200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