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발해사

해동성국의 광채
날조의 티끌로 가릴수야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옌볜고급중학교 2학년 때, 몇몇 학우들과 함께 발해의 옛터를 찾아 수학여행에 나섰다. 간 곳은 발해의 5경 중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상경성(상경용천부:현 닝안시)과 부근의 경박호였다. 사실 옌볜은 이 5경으로 에워싸인 고장이라서 어릴 적부터 발해에 관한 이야기를 적잖게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발해의 마지막 왕이 보석거울을 물속에 감췄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경박호(鏡泊湖)는 그 신비로운 거울빛으로 하여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막상 가보니 고즈넉한 황성터만이 숲 속에 파묻혀 발해의 옛 영광를 알릴듯 말듯할 뿐이었다. 그러나 경박호의 폭포며, 괴암이며, 거울 같이 맑디맑은 물만은 마냥 천고의 불변을 자랑이나 하듯 여전히 의젓하였다. 정말로 발해의 ‘으뜸 명승지’ 다웠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이 남아있는 것은 우물이나 사진관, 식당 등에 ‘고구려’나 ‘발해’란 이름이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 땅이 아니었는데도, ‘고구려’란 이름이 그토록 쓰여지고 있는 것은 현지인들의 말을 빌면 고구려와 발해는 ‘그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란 뜻이다. 발해의 정체성을 압축한 말이다.

그 발해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컸던 나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조금만 알고 있는 나라다. 발해가 통일신라에 비해 수명은 약간(30년쯤) 짧지만, 그 크기는 4~5배에 달하는데도, 발해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통일신라의 그것에 비해 40~50분의 일도 채 안되니 하는 소리다.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는 ‘우리 나라 선비들이 신라 9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 버리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한 바 있다.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거니와, 그 무지와 무시가 끝내 천여 년을 넘어선 오늘에 와서 그 참역사가 송두리째 말소될 위기를 자초하고야 말았다.

고구려 옛땅 무시한 신라중심의 삼국사기
집요한 식민사관의 변조 그리고 중국의 왜곡까지
수난의 한겨레 북방사

그렇게 된 데는 발해인들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 없다든가, 그들의 활동지역이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곳과는 달랐다든가 하는 탓도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발해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나 도외시였다. <삼국사기>는 신라중심주의의 편견에서 발해사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불완전성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또하나의 우리 민족국가인 북방의 발해까지를 아우르는 완전 통일로 이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국가 분립시대를 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른바 ‘일통삼한’의 내재적 한계성이며, 우리 겨레의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것이 아니었던들, 발해는 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지는 않았을 것이며, 발해의 수난에 허무한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해와 통일신라는 똑같이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의 기간에 대동강과 원산만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한 우리 민족의 두 역사주체였다. 그들 사이에는 운명공동체의식에 바탕한 친선과 교류관계가 있었지만, 무모한 경쟁과 대립관계도 있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은 건국 2년만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고, 신라도 원성왕과 헌덕왕 때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거란의 공격에 직면한 발해가 원군을 요청하자 신라는 이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발해의 동경 용원부(현 훈춘)에서 신라의 국경도시 천정군(현 덕원) 사이에는 39개 역을 걸치는 ‘신라도’가 개척되어 두 나라간에는 상당한 교류와 내왕이 있었다.

이에 반해, 신라는 대조영에게 고작 5품인 대아찬이란 관등을 주고나서는 얼마 뒤 당과 발해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당의 요청에 따라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다가 고배를 마신다. 그런가 하면 두 나라는 당의 농간에 휘말려 서로가 티격태격한다. 당에 간 발해사신이 신라사신보다 웃자리에 앉을 것을 요청하다가 거절당한 ‘쟁장(爭長)사건’, 당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 신라의 최언위가 발해의 오광찬보다 석차가 앞서자 당에 사신으로 간 오광찬의 아버지 오소도가 아들의 석차를 올려달라고 청하다가 역시 거절당한 ‘등제서열사건’ 따위가 바로 그러한 실례다. 최치원 같은 대문호도 오소도가 신라인을 제치고 장원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쭉정이’와 ‘술찌거기’에 비유하는 배타적 옹졸함을 보인다.

하지만 민족사에 점철된 이러한 오점은 일군의 선현들에 의해 즉각 적출됨으로써 우리의 하나된 민족사는 살아 숨쉬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는 소략하나마 발해의 건국과정과 해동성국의 성세를 전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규원사화>는 발해유민이 고려에서 썼다는 < 貶だ??震域遺記)>(지금은 소실됨)란 역사서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자 유득공은 1784년에 쓴 <발해고> 서문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고 서술함으로써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설정하였다. 다산 정약용도 그의 <아방강역고>와 <발해속고>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했다. 바야흐로 민족사는 제곬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편 삼국유사서 신채호등의 민족사학으로
다시 90년대 복원운동까지 바로세우기 거센 물결
발해사는 다시 눈뜬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제의 역사강점기가 도래하면서 이 흐름은 추하게 오염된다. 일제 관변 사학자들의 주창한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올가미에 걸려 발해사는 고구려사와 더불어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된다. 게다가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에서 비롯된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가리워 발해사는 우리의 정통민족사에서 자꾸만 멀어져갔다.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신라가 있는데, 어찌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있단말인가 하는 그럴싸한 강변이다. 발해가 당한 이중삼중의 수난이다. 오늘날까지도 발해사를 ‘요동사’의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등 그 수난의 여파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수난 속에서도 일제의 강권사관에 맞서 우리의 민족사 정통과 민족정기를 지키려는 양식있는 지성들이 있었으니, 그네들이 바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박은식의 <발해사>, 장도빈의 <국사>, 권덕규의 <조선유기> 같은 일련의 민족사학 저서들에는 그러한 지향과 기상이 한결같이 돋보인다. 신채호는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을 부여와 고구려, 발해로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은식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을 찾아다니면서 망국의 설움을 국사 연구로 달랬다. 장도빈과 권덕규는 신라와 발해를 각각 ‘남북국’과 ‘남북조’로 구분하면서 남북방 민족사의 정통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대쪽으로 엮어낸 선학들의 민족사는 후학들의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광복 후 남북한에서는 선학들의 이러한 민족사학 정신을 이어받아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다시 발해로 이어진 우리 겨레의 정통 북방사를 복원하는 연구가 지속되어 왔다. 비록 그 메아리가 아직 크지는 않지만, 그 성과는 자못 다부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남북한에서 발표된 관련논저만도 6백여 편에 달하는데, 그 절반 이상은 주변국의 발해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90년대 이후에 저술된 것이다.

발해에 관해 중국은 당나라의 변방 소수민족인 말갈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며, 러시아는 당나라와는 무관하게 말갈족이 세운 극동의 첫 독립국가라고 하면서 은근히 영유욕을 내비친다. 일본학계에서는 독립국가이기는 하나 지배층은 고구려유민이며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이중구조설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까지 이 이중구조설이 우리네 일부 교재까지 반영된 것은 일본학계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특히 중국은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이론적 지침하에 70년대부터 발해가 당나라에 신속된 지방정권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본격적인 정지작업을 해오다가 드디어 2002년에 시작된 관변 주도의 ‘동북공정’을 통해 이를 굳히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다. 그 일환으로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놓고 외부인, 특히 한국인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장막 뒤에서 발해유적의 유네스코 단독 등재 같은 발해사의 완전 변조를 꾀하는 모종의 계략이 꾸며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발해는 현대들어 또한번 수난을 겪고 있다. 역사는 장막을 쳐놓고 가린다고 해서 가리워지는 법이 없다.

우리의 해동성국 발해는 오늘까지도 그 수난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연장시킬 수는 없다.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귀감을 얻어 발해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오롯하게 밝혀냄으로써 왜곡과 변조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흙탕을 헤집고 솟아 흐르는 샘물처럼 수난을 극복하는 슬기와 용기가 있다.

<정수일 교수>

(한겨레신문 200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