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부 `중국 국가지리`

지난 6월에 '중국 국가지리'라는 잡지에 고구려사 관련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가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한데 내용이 전율할 정도 가증스럽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중국은 아예 시조부터 중국인이었다고 적고 있을 정도 입니다. 외견상 고구려사 왜곡문제는 더이상 악화되지 않는 선에서 한중 양국이 외교적 봉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일 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글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10년전부터 중국은 철저한 자료확보작업을 거쳐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동안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식한 중국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에는 굳은 맹세까지 합니다. 반드시 중국사를 되찾아 오겠다고요.
번역한 글이 길지만 이곳에 들어온 분들은 꼭 일독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고구려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같이 고민했으면 합니다.


제목: 잃어버린 고구려를 찾아서

고구려, 우리나라 역사책이 말하는 高句驪, 高驪, 高麗는 기원전 37년 우리나라 동북지역의 변강민족이 세운 정권이었고 서기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7세기 간 존재하였다.

이처럼 오랜기간 우리나라 동북지역을 주름잡았던 고구려 정권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그 역사는 부지불식간에 무수히 많은 역사서속에 묻히면서, 역사가에게도 점점 잊혀졌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일어난 한반도의 왕씨 고려와 혼합되었다.

청대말 고구려 호태왕비가 발견됨에 따라, 고구려 역사 탐색이 새로운 학자들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1998년 8월 “고구려 역사 연구” 과제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우리나라 영토내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였는데, 옛된 고구려 호태왕비, 수풀림속에 묻힌 고구려 왕성, 눈부시게 아름다운 무덤벽화, 동방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장군총..., 이들 고구려인이 남긴 유적은 나의 마음을 절절히 흔들어 놓았다.

<호태왕비>의 발견

서기 414년 호태왕이라 불리는 고구려왕 고안(또는 담덕이라 불림)은 그의 신민을 떠나, 압록강 주변 산기슭의 경사진 밭위에 장사지냈고, 그 아들 고구려 장수왕 고련은 자손들이 호태왕의 업적을 기억하도록 거대한 응회암을 골라 간단한 가공을 하여 비석을 세웠고 부친의 업적을 세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고구려 <호태왕비>이다. <호태왕비>는 우리가 자주 보아오던 비석과 다른데, 투박한 재작뿐만 아니라 거대한 크기, 불규칙한 모서리에 6.39m높이에 사면의 가로길이는 1.43m, 1.34m, 1.97m, 1.43m이며 모서리 사면의 가로길이는 1.61m, 1m, 1.95m, 1m이며 1775개의 자가 새겨져 있다.

예스럽고 투박한 <호태왕비>는 세워진 후 2백여년 동안 고구려 국왕과 신민의 예우를 받으며 휘황찬란하게 서 있다가 서기 668년 고구려가 당에 의해 통일된 후, <호태왕비>는 이전의 관심을 잃어버리고, 특히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은 후 동북지역에 봉금정책을 펼쳐, 이 비석은 사람이 닿지 않는 곳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풀이 우거지며 푸른 이끼로 덮이게 되었다.

그러나 <호태왕비>는 점점 기억속에 잊혀져가는 고구려민족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 1877년 <호태왕비>의 재발견과 함께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고구려역사 연구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호태왕비>의 재발견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만주족이 백두산에서 일어나, 청나라 초 백두산 일대는 “성지”로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청나라 후기 대량의 한반도 사람들이 부단히 들어왔으며, 러시아는 사변을 자주 일으키어, 해금조치는 청나라 견고한 변경방어의 중요한 조치로써 백두산 일대에서 실행되었다.

광서3년(1877) 청나라 길림동부 변강지구에 懷仁현(후에 환인현으로 바뀜)을 설치했고, 장월은 설치위원이 되어 관료 관월산을 데리고 부임하여 경지와 호구를 조사하고 기구설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관월산은 금석학에 밝아 틈틈이 도처의 고적을 찾아 다녔고 마침내 수풀속에서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호태왕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관월산은 손수 글자를 탁본해 동호인들에게 나누어 주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탁본하기 시작해 <호태왕비>탁본은 수도에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비문의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담국환의 <호태왕비수찰>, 유이의 <호태왕비고정>, 성민의 <호태왕비석문> 등등은 모두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호태왕비>연구열풍은 사람들에게 고구려역사에 대한 관심을 바로 불러일으키지는 않았고, 비교적 체계적인 고구려사 저작은 1941년에 비로서 나타났는데, 김육불의 <동북통사>(상편)이다. 유감인 것은 김 의 연구는 학계의 계승과 발전을 얻지 못하고, 건국 후 우리나라 학자들은 고구려 유적의 발굴과 보호에 치중했으며 고구려사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20세기 80년대 이후 점차적으로 시작되어 희미한 고구려사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 찬란한 고구려사는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찬란한 역사

기원전 37년, 서한 현도군 고구려현(요녕성 신빈현 동남)에 부여왕자 주몽이 이끄는 도망나온 무리와 현지의 다른 민족과 연합하여, 고구려현에 직접 관할되는 약소정권을 세웠고 사서에는 고구려라 칭하며, 이로부터 우리나라 동북 및 한반도 중북부를 차지하는 고구려가 시작된 것이다.

부여는 우리나라 동북지역의 변강민족이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부여의 왕자였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에 관한 신화가 기록돼 있다: 주몽의 모친은 하백의 딸이었고, 부여왕에게 시집을 간 후 감금돼 있었다. 하루는 태양이 그녀의 몸을 쬐어 피하지 못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고 하나의 커다란 알을 낳았다. 부여왕은 알을 보고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덮어 알을 따뜻하게 했다. 부여왕은 이상히 여겨 칼로 잘랐으나 깰 수 없어서 그 모친에게 돌려 주었다.

그 모친이 그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남자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남자아이는 활을 잘 쏘았는데 부여인들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러서 주몽이 그 아이의 이름이 되었다. 부여인은 주몽이 비정상적으로 태어났기에 그를 없애기로 음모를 꾸몄고 주몽은 할 수 없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남으로 도망쳐 서한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현에 가 고구려현에 소속된 신민이 되었다.

현도군은 서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조선을 통일하고 설치한 하나의 지방기구이다. 주가 상을 멸할 때 상의 기자는 무리를 이끌고 동으로 도망하여, 오늘날 평양지역에 하나의 정권을 세웠는데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고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이라 한다. 기자조선은 주를 존중해 주의 한 지방정권이었다. 서한 초기 위만이라 하는 연나라 사람이 난을 피해 조선으로 갔고, 피난 온 중원인을 규합하여 조선의 통치권을 탈취했는데 학계에서는 위만조선이라 한다. 위만조선은 초기 서한의 신하였으나 줄곧 확대정책을 펴 다른 변강민족이 서한에 조공을 바치는 걸 막았고, 서한 요동군 동부도위를 살해하여 결과적으로 서한의 여러 차례의 정벌을 초래하였다.

기원전 108년 위씨조선은 서한에 의해 통일이 돼 서한은 위씨조선과 그 주변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 사군을 두었고 한반도 중부 이북의 더 큰 지역을 관할했다.

그 중 현도군은 원래 옥저현(오늘날 대략 북한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었는데, 후에 고구려현으로 옮겨 고구려정권은 고구려현에서 나타났다.

고구려정권은 미약하게 출발하여 서한의 중시를 받지 못했으나 왕망이 서한의 통치권을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운 이후 고구려는 발전기회를 얻게 되었다. 서기 9년 왕망은 먼저 고구려왕을 고구려후로 격하하고 고구려군대를 징용하여 흉노정벌에 참가시켰으나 장기주둔으로 진격이 없었기에 고구려군대는 도망자가 속출하고 급기야 왕망의 요서태수를 살해했다.

고구려군대의 배반으로 왕망은 고구려에 강한 압박정책을 펼치고, 고구려 후인 추를 유인살해하여, 고구려는 건국이래 첫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망 후기의 중원내란으로 고구려는 일어설 기회를 얻었으며, 동한이 세워진 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왕의 칭호를 회복하였고 주위의 변강민족들을 부단히 합병하여 강성해져 갔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접어든 후, 전국을 통일한 중앙왕조의 부재는 고구려에게 더 큰 발전 기회를 주었으며 고구려가 비록 중원의 각 왕조에 신하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조씨의 위나라와 모용씨의 선비정권에 두 차례의 큰 타격을 입었더라도, 고구려의 발전형세를 저지할 수 없어서 고구려는 동아시아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서기 244년 고구려는 조씨 위나라 요동군 서안평에 진격했기에 유주자사 무구검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 도성 환도성으로 진격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무구검기념비>는 그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서기 319년 고구려는 서진 동이교위 최비가 꾸민 모용씨 선비정권 토벌에 참가하였고, 그 후 부단히 모용씨 선비족 영토를 침범하였다. 서기 342년 모용 선비족의 4만 군대가 환도성을 공격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왕 교의 모친과 아내 등 5만 여명을 생포하고 그 부친의 무덤을 훼손하며 유골을 도적질했다.

두 차례의 큰 타격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한편으로는 중원지역의 여러 왕조와 칭신ㆍ조공의 관계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부로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의 북진을 억제하고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는 이 시기의 강역은 한반도 중부에서 길림성 중부, 동으로는 길림성 연길, 서로는 요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다.

고구려는 서한 때 군현 직할의 제후국에서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위서, 고구려전>)의 영토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위진남북조 시기의 장기간의 분열이 가져오는 발전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였으나 고구려는 부단히 강성해지는 중에 중국과 관계를 끊은 적이 없었고, 그 도성을 여러 번 천도하였지만 서한의 낙랑, 현도, 직번, 임둔 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그 강역은 기본적으로 이 사군의 범위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홀승골성이고 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마지막으로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홀승골성의 위치에 관해 현재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는 요녕성 환인의 오녀산성이다. 둘째는 환인현에서 서북 3km떨어진 혼강 주변의 고성자고성이다. 국내성은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 있고 환도산성(위나암성이라고도 함)과 평지위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평양성은 오늘의 평양지역이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도읍으로 정한 곳이며 낙랑군이 다스렸던 곳이며 대성산성, 안학궁 등의 유적은 고구려가 평양천도 이후 세웠던 것이다.

수ㆍ당 이후 통일이 중국역사의 발전대세였으나 고구려는 여전히 지역할거의 상황에 있었고, 먼저 개황 18년(598년) 2월 고구려왕 원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하였는데 비록 영주총관 위충이 격퇴시켰지만 수문제의 분노를 일으켜 수 왕조의 여러 정벌을 야기시켰다; 후에 공연히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태종의 조서를 위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 사신을 감금하여 정관 18년(644년) 당조는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기 시작하였고 전쟁은 총장 원년(668년)까지 이어졌으나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당은 “고려 5부, 176개 성, 69여만 戶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나누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해 다스리고, 수령 중 공이 있는 자를 선별해 도독, 자사, 현령으로 임명 중화인과 같이 정치에 참여케 한다.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검교 안동도독으로 임명, 20만 병사를 주둔시킨다.” (<자치통감> 201권) 7세기에 걸쳐 동북을 할거한 고구려는 결국 다시 중국이 통일한 판도내에 들어가게 되었고, 통일에서 분열로 다시 분열에서 통일로 가는 역사과정을 완성하였다.

찬란한 문화

7세기에 걸쳐 동북을 할거하면서, 고구려가 중원의 각 왕조와 밀접한 정치적 관계에 있을 때 중원과 빈번한 경제ㆍ문화적 접촉을 가짐으로 찬란한 고구려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산성은 고구려문화의 대표인데 그중 요녕성에 약 80여개가 있으며, 길림성과 북한에 부정확하긴 하지만 50여개가 있다. 고구려산성은 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건축되었거나, 혹은 하천과 골짜기를 양 측으로 하는 산에 건설되었거나 또는 두 하천을 끼는 높은 산과 계곡에 건설되었거나 교통의 요지에 건설되었는데 그 중 도성이 가장 특색있다.

요녕성 환인현에서 동북방향으로 8km떨어진 오녀산 위의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의 도성으로 여겨진다. 산성은 산 꼭대기에 위치해있고 동쪽은 산비탈길이며 불규칙한 장방형이며 남북이 약 1천미터, 동서는 4백미터이며 둘레는 2천8백미터이다. 고성유적에 올라서면, 환인현 성과 환인저수지가 눈 아래로 보이는데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 훈강은 오녀산 동쪽면에서 남으로 흐르고 산성 남쪽에서 굽이어 흐른다. 산성은 산을 기대어 지어졌고 산세의 험준함을 충분히 이용하여 주요부분은 산 정상에 위치해 있고, 동쪽과 남쪽산세는 상대적으로 평평하기에 두 개의 성벽이 있다. 동쪽 성벽은 산허리에 있고 대략 호형(弧形)이고 길이는 1천미터이며, 남쪽성벽은 전체길이가 110미터이다. 서쪽과 북쪽면은 산세가 험해 천연의 장벽이 된다. 산성은 세 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쪽성벽, 남쪽성벽과 산정상 서부절벽의 갈라진 곳에 있다. 일직이 버려져 사용하지 않았기에 오녀산성은 이미 공원이 되어 유적 위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고, 아직 남아있는 성벽은 장군을 지명하여 임무를 부여하던 곳과 저수지 등의 유적은 사람들에게 지난날의 영화를 말하고 있다.

서기 3년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옮겨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내의 평원 유적지와 서북으로 2.5km떨어진 환도산성은 고구려 중기 도성이다. 집안시는 압록강 우편에 있고 통구분지의 서편에 있으며 성 동쪽 약 6km 떨어진 곳에 용산이 솟아있고, 북쪽 1km 떨어진 곳에 우산이 있다. 노령산맥에서 발원하는 통구 강은 북에서 구불구불 흘러와, 성 서쪽을 거쳐 성 서남쪽 모서리에서 굽어져 동남으로 바뀌어 압록강으로 흘러간다. 평원성은 방형(方形)인데 동서남북 각각 554.7m, 664.6m, 751.5m, 715.2m 이며 방형 혹은 장방형의 석재를 써 이가 엇갈리게 평평히 쌓아 아래가 두껍고 위로 점점 가늘어지는 양식으로 쌓아 현재 가장 많이 남아있는 벽은 11층이다: 성문은 6개가 있었는데 남북 하나씩, 동서 두 개씩이고 성 동쪽과 북쪽에 폭 10m의 해자가 있었다.

백두산계에 속하는 노령산맥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집안 전체를 가로지르고, 통하강 오른쪽 기슭에는 하나의 반원형 산봉우리가 있는데 해발 676m이고, 환도산성은 이 반원형의 산봉우리를 따라 세워졌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강ㆍ골짜기ㆍ분지를 바라보며 통하강은 성남쪽으로 흐른다. 도쪽 벽은 1716m이고 서쪽 벽은 2440m이며 남쪽 벽은 1786m, 북쪽 벽은 1009m 이다. 산성 서북 모서리에는 작은 산봉우리가 있고, 성벽은 산봉우리 바깥을 감싸고 있으며 반원형을 띄고 있고 윗부분과 산정산은 가지런하고, 하나의 직경 8m의 평대(임금이 군신을 접견하던 높은 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평대위에 서자 산성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성벽의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있었고, 동쪽벽 남단과 서쪽벽 북단 그리고 북쪽벽의 보존상태는비교적 양호했고 성벽 정상의 바깥부분은 보수된 보조담벽이 있는데 높이 1m 정도였다. 산성에 수리된 5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쪽과 북쪽에 각각 2개, 남쪽에 1개였다. 남문 안 약 200m 떨어진 곳에 석조 전망대가 있었는데 약 12m 높이었다. 높은 대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강 골짜기와 집안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사서의 기? 臼?의하면, 고구려의 도성은 일반적으로 두 성으로 구성되어 평원에 있는 성은 고구려왕이 평상시 거하는 성이고, 산성은 고구려왕이 전시에 거하는 성이다. 현재의 집안시에 위치한 평원성과 환도산성은 바로 사서속의 이 같은 기재를 인증하고 있다.

서기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고구려 말기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다. 현재 평양지역에 남아 있는 관련 유적으로는 ‘대성산 산성’, ‘청암리 고성’, ‘안학궁’ 및 평양시내에 위치한 ‘고성유적’ 등 총 4개의 당시의 성 부지가 남아있다.

‘대성산 산성’은 평양시 동북쪽 약 7킬로미터쯤 떨어진 대동강 북쪽의 산지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길이가 전체 7,218미터, 성내 면적은 2.7평방킬로미터이다. 전체 산성의 형상은 ‘환도산성’과 비슷하다. 산성은 내외 양측의 성벽으로 되어 있고, 산봉우리 부근에 위치한 성벽에는 보통 사각모양의 누각을 만들었으며, 성내에는 연못, 우물, 창고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청암리 산성’은 현 평양시 동북쪽에 위치한 대동강 북쪽의 작은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길이는 2,700미터이다. 동북쪽으로 ‘대성산 산성’과 4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다. ‘안학궁’은 사각형 형태로 동서남북 벽의 길이는 각각 617, 618, 622, 623미터이다. 벽은 돌과 흙으로 지어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의 높이는 4미터이다. 성벽의 건축 양식은 ‘집안’의 국내 성벽 유적과 비슷하다. 성에는 6개의 문을 만들었다.

산성과 평원성이 서로 결합되고 있는 구조 때문에,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대성산 산성’과 ‘안학궁’이 고구려 말기의 도성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나, 이는 평양 천도후 전기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평양시내의 고성 유적지에서는 각석(刻石)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기록으로 볼 때 이 성은 552년에 지어지기 시작, 593년에 완공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어, 이곳은 평양 천도후 후기의 도성 소재지일 가능성도 있다.

옛 무덤 유적지는 고구려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문화로서 돌을 쌓아 만든 ‘적석묘(積石墓)’와 흙으로 덮어 만든 ‘봉토묘(封土墓)’ 두 가지로 나뉜다. <삼국지ㆍ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인이 ‘돌을 쌓아서 묻는’ 습관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유적 조사를 통해서도 증명되었으며, ‘환인’에서 발견된 750개의 묘 중에서 95%가 적석묘이며, ‘집안’지역의 1/2의 무덤이 모두 적석묘이다. 많은 적석묘 중 ‘집안’ 지역 동북쪽 4.5킬로미터 지역의 ‘장군총(將軍墓)’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는 무덤이다. ‘장군총’은 용산 아랫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덤은 큰 돌로 바닥을 깐 후에 전부 화강암으로 쌓았는데, 모두 7층으로 나뉘어 제일 아래층에는 4층의 돌이 있고, 위로 각 3층이 있으며, 모두 1,100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 실내에 개폐구는 5층의 중간부분에 설치되어 있으며, 실내는 넓고, 사방의 벽은 6층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제일 윗부분은 큰 천정석 하나를 덮어 놓았다. ‘장군총’은 구조가 정연하고 정밀해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웅장한 느낌을 주며, 구조가 피라미드와 비슷해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대량의 적석묘가 존재하는 것이 사서에 기재되어 있기는 하나 그래도 더 많이 보이는 것이 봉토묘이다. 이들 봉토묘에서 가장 진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다. 현재 이미 발견된 고분벽화는 101개가 있으며, 그중 우리 국경내에 있는 것이 33개, 북한에 있는 것이 68개이다. 분포지역은 주로 우리나라의 ‘환인’, ‘집안’ 및 북한의 평양 지역인데, 이 지역들은 모두 고구려에서 도읍으로 정한 적이 있는 곳들이다. 고분벽화의 소재는 상당히 다양하나 기본적으로 3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주거, 연회, 가무, 출행, 수렵, 전쟁, 가축 등의 일반생활을 제재로 한 벽화이다. ‘집안’에서 발견된 무용총 벽화의 연회도는 상당히 특색이 있는데, 주거 환경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남자 주인이 벽화의 중앙에 위치하고, 오른쪽에 여인이 머리를 숙이고 굻어 앉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남자 주인을 향해 있는 모습을 볼 때 처나 첩의 신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남자 주인공의 좌우로는 연회상이 차려져 있으며 상위에는 활과 궁 그리고 음식이 차려져 있다. 좌우 및 실외에 남자 및 여자 하인들이 있다. 전체 벽화의 구조가 상당히 균형을 갖추고 있으며 고구려 귀족의 일상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주작, 현무, 청룡, 백호 네 가지 신의 형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벽화로 중국(中原) 한나라때(漢代) 건축물 및 고분에서도 자주 보이고, 고구려 벽화에서도 자주 보여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네 가지 신의 형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조정(澡井)’에서인데 규모가 비교적 작다. 남북조 후기에서 수당 초기에 고구려 고분에서 비교적 완전하면서도 큰 규모의 네 가지 신의 형상이 나타나며, 전체 화폭의 중심에 네 가지 신을 중심으로 한 벽화가 만들어 졌다. ‘집안’에서 발견된 ‘사신(四神) 고분’, ‘오회묘(五盔墳)’ 4호와 5호 묘 등도 모두 네 가지 신의 형상을 주제로 한 벽화이다. ‘오회묘’의 경우 양쪽에 주작을 그렸고, 북쪽 벽에는 현무를, 동쪽에는 청룡을, 서쪽에는 백호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 한 종류는 장식 도안을 주제로 그려진 벽화인데, 연꽃무늬, 구름무늬 등등을 그리고 있다.
이 밖에 고구려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으로는 도자기, 금속기 등등이 있다.

찬란한 고구려 문화는 중원문화의 영향과 고구려인 자신의 노력과 창조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고구려와 중원지역 문화 교류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가능했다. 이 같은 활발한 문화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는 어떤 것은 직접적으로, 어떤 것은 여러 가지 행사에 내포되어 고구려와 중국 중앙왕조와의 관계 형성과 발전 각 방면에 관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한왕조 시기부터 고구려와 중국의 중앙왕조 및 일부 변경지역의 정권을 포함한 중앙왕조간의 사신 왕래는 상당히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양측간의 사신 왕래는 비록 서로 다른 사명을 지니고 있었으나 문화교류 방면에서는 오히려 동일하게 촉진 작용을 하였으며, 양측간의 문화교류의 주요 전파자의 하나가 되었으며, 예의, 제도, 불교, 도교, 역법 등등 고구려에 전파된 모든 것에서는 사신들의 역할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정권에 많은 중국인(漢人)이 존재하는 것도 고구려 문화가 중원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은 원인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몇 가지 역사적 수수께끼

찬란한 고구려 문화를 보며 나의 마음이 이렇듯 안타까운 것은 7세기라는 오랜 역사동안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던 고구려(高句麗 政權)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졌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 역사가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계사 내지는 조선사(朝鮮史)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고구려인들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한나라(漢代)의 직접관할 구역인 현토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麗縣) 내에 나타난 지방정권이다. 이 정권을 창건한 민족인 부여인 뿐만 아니라 고구려현 내의 기타 민족 모두 우리 역사상의 변방민족으로, 고구려 정권 중에는 많은 중국 한인(漢人)이 있었으며, 그 활동 구역도 기본적으로 한나라 4군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졌다. 그 영토 및 민족 방면으로 볼 때도 중국의 영역(고구려의 활동 구역은 현재 대부분이 여전히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되어 있음)과 중화민족(주체 부분이 한족으로 융합됨)으로,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중국의 역사에 해당한다.

동북아 역사에서는 두 개의 ‘고려정권(高麗政權)’이 나타났다. 하나는 기원전 37년에 우리나라 서한시대 현토군 고구려현에 거점을 두고 나타난 ‘고구려(高句麗)’ 지방정권으로 우리나라 사서에서는 이를 ‘고려(高麗)’라 칭했다. 다른 하나는 918년에 한반도에서 세워진 나라도 ‘고려(高麗)’라 명했다.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자의 왕의 성이 고씨였기에 ‘고씨 고려(高氏高麗)’라 칭하고, 후자의 통치자 성이 왕씨여서 이를 ‘왕씨 고려(王氏高麗)’라 부르고 있다. 이 두 정권 모두 고려(高麗)로 불렸기에 후인들은 이들 두 나라가 서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여 고구려 역사 인식에 극도의 혼란이 초래되었으나 실제로 이들 둘은 완전히 다른 정권이다.

첫째, 두 정권의 건국시기가 확연한 차이가 있으며, 그 역사적 발전 귀추도 다르다. ‘고시 고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처음에는 서한 현토군 고구려현에 속했으나 점차적으로 강성해졌다. 그러나 중앙 왕조와의 신하 관계를 단절한 적이 없었으며 668년 ‘고씨 고려’는 마침내 당나라(唐朝)에 의해 통일되었다. ‘고씨 고려’의 관할구역은 처음에는 모두 당나라 안동도호부(지금의 평양)에서 관할하였으나, 수십년 후 일부 영토가 우리 역사상 다른 지방정권 발해에 의해 점거되었고, 일부분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정권인 신라로 넘어갔으며, 일부는 여전히 안동도호부에서 관할했다; 고구려족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의해 중국 내지로 옮겨왔고 후에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일부는 주변의 각 민족에게로 융합되었으며, 그 왕족도 후에 대가 끊겨 7세기간의 ‘고씨 고려’도 중국 역사의 긴 강 속에서 소실되었다.

이에 비해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가 멸망한 250년 뒤인 918년에 건국되었으며, 935년 한반도의 또 다른 정권인 신라를 대신했으며,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 중남부 대부분 지역을 통일하였다. 1392년에는 ‘왕씨 고려’의 대신인 이성계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왕으로 사했으며, ‘왕씨 고려’라는 국명을 ‘조선’으로 고쳤다.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혹은 ‘이조’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명, 청시대에서 말하는 조선으로, 그 국토는 현재의 북한과 한국이 되었으며, 현재의 조선족(朝鮮族)혹은 한민족(韓族)이 되었다.

둘째, 통치구역이 서로 다르다. ‘고씨 고려’는 처음에 우리 국경내의 압록강 지류인 훈강 유역 및 그 부근 지역에서 세워졌다가 후에 압록강 동남쪽과 두만강 부근으로 확대되었으며, 통치의 중심은 최초에는 현재의 요녕 환인현潔珦립?후에 현재의 길림 집안으로 이동하게 되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다. ‘고씨 고려’는 우리의 남북조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가장 강성한 시기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일본해, 서북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현재의 길림성 훈춘시 일대, 남쪽으로는 북한강 이북에까지 이르렀다. <고구려사ㆍ지리지>에 의하면, ‘왕씨 고려’는 건국 110년 후의 영토가 가장 북쪽은 현재의 대동강 이북 용흥강 일대였고, 그 이북은 우리역사상의 지방 정권인 발해의 관할지였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우리의 변방민족인 여진족의 활동지역이었다 한다. 다시 말하면 ‘왕씨 고려’의 영토는 기본적으로 신라 영토를 계승한 것으로 그 북부지역이 비록 일부 ‘고씨 고령’의 영토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으나, ‘고씨 고려’ 멸망 초기 이미 신라 영토에 속한 것이었다.

셋째는 영토내 민족구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고씨 고려’ 영토내의 민족은 대부분이 ‘고구려족(高句麗族)’이었다. 고구려족의 근원은 우리나라 상고시대 민족인 예맥인(穢貊人)이 동쪽으로 옮긴 후의 부여(夫余), 고이(高夷), 옥저(沃沮), 소수맥(小水貊), 동예(東穢) 등으로, 후에는 또한 ‘위씨 조선’ 유민들의 후대 및 한인(漢人), 조비인(朝卑人) 등과 융합되었다. 이들 서로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이 장기간 함께 생활하면서 점진적으로 하나가 되었는데, 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으로 칭한다. ‘왕씨 고려’ 영토내의 민족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본래 신라에서 건립된 정권이었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친 후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거주민이 되었다. 신라인은 주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진한과 변한인에서 기원하며, ‘고씨 고려’가 멸망한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그 쪽으로 유입되었으나 이는 신라인의 주 원류는 아니다. 백제는 주로 한반도 남부의 마한인에서 근원한다. 다시 말해 ‘왕씨 고려’의 주요 거주민은 한반도 남부의 ‘삼한’ 인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고 있으며, 대량의 역사 ! 기록에서도 왕씨 고려인과 우리의 고인들이 ‘왕씨 고려’를 ‘삼한에서 시작된 것(三韓氏舊)’으로 보았음이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한반도 남부에서 근원하는 민족 구성원은 ‘왕씨 고려’ 수백년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하나의 민족이 되는데, 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를 고려족(高麗族)이라 부른다. ‘왕씨 고려’는 이씨 조선이 그 뒤를 이었고, 조선이 고려의 국호를 대신했으며 민족 칭호도 함께 변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넷째,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 건국자인 왕건의 민족과 관련, <고려사> 작자는 ‘고려의 선대는 기록이 단절되어 나타나 있지 않다(高麗之先, 史闕未詳)’고 밝히고 있으나, 우리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 낙랑군 한인(漢人)의 휴예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왕씨가 당시 낙랑군의 망족(望族)으로 인구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왕건은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십훈요>에는 자기가 ‘고씨 고려’의 후예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서민출신이라 말했으며,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통일했으니 그 후대도 ‘삼한’에서 거주하기를 바랬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만약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통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알렸을 것임을 감안할 때, 이 또한 왕씨가 고씨의 후예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어느 방면으로 보더라도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계승관계로 연결시키기는 어려우며, 단지 확인할 수 없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고려(高麗)’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한민족(朝鮮民族)은 한반도 남부에서 발전해 왔으며, 그 직접적 근원은 마한, 진한, 변환으로 거슬러 갈 수 있다. 비록 고구려 정권 멸망후 일부 고구려인이 한민족의 형성 과정에 유입되기는 했으나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으며, 또한 ‘조선’으로 불리는 기자조선, 위씨조선과도 계승관계가 없다. 기자조선, 위씨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이미 서한의 직접 관할구역이 되었으며, 후에 이 지역은 고구려 정권의 영토가 되었다. 이는 동시에 수당 양국이 고구려를 무력 통일하려는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조선족의 중국 진입은 대부분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19세기 40년대에서 1880년은 조선족이 중국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시기로, 청나라 봉금정책(封禁政策)이 점진적으로 느슨해지면서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에 이들이 거주하는 작은 구역이 형성되었다. (2) 1881년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면서 조선인이 대량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많은 조선인이 생계를 위해 우리나라 동북지역으로 들어왔으며, 1930년 연변? 熾た?이미 40만명의 조선인이 살게 되었다. (3) 1931년 동북이 함락된 후 일본이 강제 이민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인의 중국 진입이 다시 한번 고조기를 이루었으며, 이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후 조선인은 우리나라 동북지역의 진입은 거의 중단되었다.

다행인 것은 최근 10여년간 고구려 역사 연구가 우리 학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과거의 잘못된 인식들이 점진적으로 바뀌어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도 갈수록 깊이를 더하고 있어 고구려 역사의 원래의 모습이 머지않은 장래에 비교적 완성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고구려연구회 게시판 / 광야 200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