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을 허물어라

고조선.고구려, 더 나아가 발해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라면 왜 만리장성이 생겨났을까? 지금 중국인이 우리의 고대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만리장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리장성을 허물겠다는 뜻이다. 장성을 쌓은 조상의 옹졸한 배타성을 부정하는 짓이다. 달나라에서도 보인다는 유일한 지구문명의 흔적을, 그렇게 그들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던, 어중이떠중이 관광객을 인산인해로 불러들여 떼돈을 벌어들이는 그 벽을, 그 웅장하고 거창한 벽을 허물겠다는 뜻이다.

멍청한 골 빈 관광객을 불러다 감탄으로 입이 벌어지는 모양새들을 마치 역사적인 위업에 대한 찬양인 줄로 착각하며 흡족해 하던 중국인이 인제 와서 무슨 속셈으로 그 정신성을 부정하는지. 성을 쌓던 그 배타성을, 그 정신적인 거부감을 인제 와서 허물어 버리겠다는 것인지.

울타리를 친다는 것은 그 밖을 안과 구분해 차별하겠다는 뜻이다. 만리나 되는 울타리를 그렇게 견고하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가면서 성을 이루듯이 쌓아나간 뜻은 그 울타리 바깥에서 우글거리는 잡종들과 성안의 국민을 차별하기 위한 짓임에 틀림이 없다. 또 물리적인 그런 장막을 치지 않고서는 그 너른 땅을 통치할 지략과 철학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단순하게 노동력을 착취해 어마어마한 장성을 쌓는 일, 그것은 중국정신의 흉측한 상징물이다. 그것은 흉노.말갈.맥 등 수도 없는 천한 이름으로 불러대면서 멀리하고 차별하던 인간 무리들을 더 심하게 차별하고 차단하기 위한 짓이었다.

그런데 그 성 바깥의 흉노, 기타 등등의 천한 족속들의 역사를 고귀하신 성안의 인간들의 그것과 같은 반열에 놓으려고 한다는 일은 기이하게 들리는 말이다. 왜? 인제 와서 왜? 그 잡것들을 끌어안으려 하는 걸까.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만리장성 쌓은 일을 후회하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만리장성을 쌓자고 말한 정책 입안자를 죽이고 흉노 등 잡종들을 포용하자는 정책으로 고대 국가, 지나간 국가, 역사 속 국가의 기강을 바꾸는 일이다. 조상의 짓거리를, 역사를 자손이 부정하고 수정하는 짓이다. 역사 수정, 역사 왜곡.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장성을 쌓자고 제안한 자를,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죽이고. 중국은 지금 열나게 '백 투 더 퓨처'하고 있다.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과거마저 입맛에 맞게 바꿔 버리려고 야단법석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4대 성인에 드는 공자를 낳은 민족. 이백.두보 등 그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초역사적인 명성을 누리는 예술가들을 가진 역사. 중화!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부르는 그 엄청난 자존심은 어느 다락에 저장해 두고, 치사하게 고조선.고구려.발해 그 황량한, 메마른 벌판의 말발굽 먼지 속의 거시기를 흘끗거리는가? 아 오등은 그저 슬플 뿐이다.

고구려는 그림을 가진 국가다. 그 그림들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어쩌고저쩌고해도 내게는 에투루스칸이라고 불리는, 프레스코 벽화를 온 천지에 그려대던 사람들만이 로마다. 화가인 나에게는 오직 에투루스만이 로마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나라는 고구려다. 말 달리면서 활 쏘는 모습, 술 마시고 차 끓이는 일상생활, 씨름하는 남자들을 간결하고 힘차게 표현한 그림들을 고분벽화로 수도 없이 남긴 고구려는 회화 전통을 강하게 가진,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고대국가다. 그런 고구려는 내 영혼의, 내 그림의 발원지다. 그런 고구려가 중국이라면? 국가 개념이 없는 구석기시대로 돌아가 원시 평화공동체로 회귀하자는, 새로운 철학의 제시로도 들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을 허물어야 한다.

<김점선 화가>

(중앙일보 200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