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文산책] 다시 읽는 '발해고'

정조 8년 유득공(柳得恭·1784~1807)은 37살 젊은 나이로 '발해고 (渤海考)'를 저작한다.

이 저술은 그 당시보다는 20세기에 와서 한국의 역사 서술에 거창한 영향을 미친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를 북국(北國), 통일신라를 남국(南國)으로 하여, 발해와 신라의 병존시대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했던 바, 이에 근거해 20세기 후반 한국사 서술이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에서 삼국시대→남 ·북국시대→고려시대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발해고' 야말로 참으로 의미있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유득공이 당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발해의 역사를 저작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던가. 서문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부여씨(扶餘氏·백제)가 망하고 고씨(高氏·고구려)가 망하자 김씨(金氏·신라)는 남쪽 땅을 차지하고, 대씨(大氏·발해의 대조영(大祚榮))는 북쪽 땅을 차지하여 '발해'라고 했으니,이 시대를 일러 남·북국 시대라 한다.

그러니 의당 남국과 북국의 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그 역사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된 것이다. '

역사를 쓰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면, 어떤 시각에서 잘못이란 것인가. 유득공의 이유는 이러하다.

발해가 망한 뒤 그 땅은 여진과 거란에게 소속되었다.

이때 고려에 생각이 트인 사람이 있어 서둘러 발해의 역사를 쓰고, 여진족에게 '어찌하여 우리 발해의 땅을 돌려주지 않느냐? 발해의 땅은 고구려의 땅이다. ' 하고 따지며 장수를 보내 그 땅을 거두어 들였다면 토문강(土門江) 이북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란에게도 같은 주장을 펼쳤더라면, 압록강 서쪽 땅 역시 고려의 소유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써야만 했던 것은 그 역사를 통해 땅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고려는 발해의 역사를 쓰지 않았기에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게 된 것이다.

그 땅은 고스란히 여진과 거란의 차지가 되었다.

고려가 약소국이 되었던 원인을 발해의 역사를 저작하지 않았던 데서 찾는 유득공의 시각은 너무나 참신하다.

역사를 쓰는 일은 이렇듯 그 의미가 막중하다.

한 나라의 성쇠(盛衰)가 역사의 서술에 매인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 라고 억지를 쓰는 통에 온 국민이 분노한다.

그럼에도 대학에서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똑똑한 젊은이는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해지고 있다.

'발해고'를 저작했던 젊은 유득공의 후예는 찾기 어렵게 된 것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시비에 '발해고서'를 읽는 심정이 무한히 착잡하다.

(부산일보 200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