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이 중국사면 청나라는 한국사

중국의 방식으로 중국을 친다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한다. "아이신지료 푸이(愛新覺羅 傅儀)."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모택동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아이신지료…, 아이신지료…. 한족(漢族)인 판사가 듣기엔 이상하기만 했던 청나라 황제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약 '애신각라'에 '(고국인)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면.

애신각라의 비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라는 중국의 억지가 10년만의 폭염으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국의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부흥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토록 가볍다. 그러나 섬뜩하게 위험하다. '섬뜩하게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노리는 것이 단지 고구려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은 상당 부분 한반도 북부와 동북아시아로 고구려와 비슷하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면 고조선도 중국사인 것이다.

실제로 중국 사학자들은 이미 이 같은 논리를 펼치고 있다. 고조선은 기자 조선과 위만 조선인데,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고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므로 결국 기자-위만 조선은 중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고조선(삼조선이라고도 불린다) 역사에서 단군조선 부분을 '공식적 한국사'에서 사실상 배제하고 신화로만 치부해온 국내 사학계의 책임이 크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박탈당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신라 건국 이후 2천년으로, 강역은 한강 이남으로 좁혀질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현재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백제도 한국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중국인'이라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는 중국의 논리를 중국 측에 그대로 되돌려 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보니까 예상대로(!) 중국의 공식 역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한족(漢族) 국가인 송나라를 강남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지배했던 금나라와 중국 역사상 최강대국인 청나라가 저절로 한국사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조선이 중국사라면,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국사에 속해야 한다. 그 건국자들의 뿌리가 한반도 남부라는 믿을만한 사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중국 흉내내기1 : 금(金), 청(淸)은 시조가 신라인이므로 한국사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세를 떨쳤던 나라를 묻는 질문에 4위를 차지한 국가가 청나라이다. 그 대단했던 청나라를-엄격히 말하면 후금(후금은 청나라의 전신이다)-세운 사람은 누루하치. 그런데 그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이 신기한 조합의 한자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고국인)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신라와 관련된 성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진다.(뒤에 서술)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청나라라면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로 불리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나라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금(金)'이 포함되어있는 것일까?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또 유명한 '삼전도 항복' 때는 친명배금을 외치는 조선에 와서 '원래 우리는 고려인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다'는 취지로 '그대는 왜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청은 조선에 번번이 형제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조선은 명분론에 매여 끝까지 청을 형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그는 누르하치가 백두산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지적하며, 당시 백두산 지역에는 만주계 조선인이 많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고려인 또는 조선인으로 귀화했다고 설명했다. 한 때, 누르하치도 평안도 지방관현에 벼슬을 수차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왜 청나라가 끝까지 조선에 호의적이었을까요? 바로 청나라가 금나라로부터 나왔고 금나라는 신라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 씨도 오 연구원과 의견을 같이 했다.
"중원을 복속하고 한족을 지배했던 곳이 청나라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청은 충분히 조선을 복속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우리 시조는 신라인"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금나라 태조와 정확히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다만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의 직계 아들인지 몇 대를 거친 손자인지는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인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유민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기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흉내내기2 : 민족개념 새로 짜기

'중화민족'은 사실 비교적 최근(중국공산당 집권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개념이다. 현재 중국의 영토에 사는 모든 민족은 모두 '중화 민족'이란 것. 이 '중화 민족'은 역사학이라기 보다 대륙의 다양한 소수 민족을 포섭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다. 이런 '우악스러운' 중화민족 개념에 대항하려면 우리도 본래의 '단일 민족' 개념을 새로 짜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여진, 거란 등의 북방 민족을 한민족(韓民族)의 테두리와 융화시키는 것일 터이다. 더욱이 이런 방식은 '중화 민족' 개념 보다는 문화, 인종, 생활방식의 유사성 등에서 훨씬 타당성이 크다.

그럼 여진 등의 기마 민족과 '한민족(韓民族)'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공을 세운 부하의 4대 후손이 누르하치라고 밝히면서 여진족, 몽골족 등과 조선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정립한다.
"이제 단일 민족 국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적으로 감행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여진, 몽골 등의 기마 민족 덕분이었습니다. 동이족이라 불리던 유라시아 반도 동북부는 그렇게 서로 뒤섞여 살았던 것입니다. 고구려 영양왕은 거란족, 말갈족을 거느리고 수나라에 대항해 싸웠고 발해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기마 부대원들도 거란, 여진족들이었지요. 심지어 여진족은 조선에 귀화하면 벼슬을 주고 조선인으로 인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혈통이 어찌 되었든 함께 어우러져 살았으니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배달회 오정윤씨는 민족개념에 대해 훨씬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 '동이족(東夷族)'에 거란, 여진, 몽골 등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거란은 '알'을 의미하는데 부화하기 전 알의 색상은 황금색입니다. 즉, 밝음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배달 민족의 '배달, 박달(밝은 들)'의 의미와 같습니다. 또한 여진은 고려의 '려'와 발해의 원래 이름인 '진'을 합해 여진이라고 한 것으로 몽골어로 밝은 온누리라는 의미에요. 또 몽골인들은 지배자를 '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칸'은 '삼한'의 '한'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동이족들은 똑같이 밝음을 숭배하고 하늘의 자손과 땅의 자손이 만나 천지를 새로 만들 아이들 잉태하는 거의 비슷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동이족에 포함된다는 민족들의 인류·신화학적 공통점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 말을 이었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몽골, 거란, 여진과 같은 여러 북방 민족을 통치했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발해가 이들을 상당수 흡수해 서로 공동체가 되었고요. 교과서에는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이 말갈족, 즉 여진족이라고 나오지만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한국인들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는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것도 조선 후기 학자인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후부터였지만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민족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려면, 발해를 구성했던 사람들, 특히 말갈인들도 한국인의 조상으로 보는 편이 훨씬 논리적일 것이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북방민족관

여기까지 쓰다 보니 '재야 사학자'들의 목소리만 너무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른바 정통주류의 질책이 우려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 북방 민족들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잠깐 살펴 보기로 한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이렇게 썼다.

"동국, 즉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은 선비족, 부여족, 지나족, 말갈족, 여진족, 토족의 여섯인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5족을 정비하고 동국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단재의 대표작인 '조선상고사' 머리말도 읽어 보기로 하자.
"흉노와 몽골을 비롯한 거란.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우리민족에서 떨어져 나간 시기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신채호를 꼽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잊고 살기 일쑤다.

이번엔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이기도 한 백암 박은식의 소설 '몽배금태조'(꿈 속에서 금 태조를 만나다)를 통해 그의 북방민족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 '무치생'(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란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서생이 만주로 떠나갔다가 꿈 속에서 금 태조 아골타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오호라. 우리 조선족과 만주족(滿洲族)은 모두 다 단군대황조의 자손으로 오랜 옛날에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또 서로 통하기도 했는데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리(分離)되면서 두만(豆滿)과 압록(鴨綠)을 경계로 이루어 양쪽의 인민(人民)이 왕래도 하지 못하고 각기 살은 지가 천여년이 되었다. 이에 따라 풍속이 같지 않게 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남같이 생각하면서 다른 종족처럼 되었다. … 대개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의 평주(平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金國)의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부락으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렇게 한탄하는 무치생을 금 태조 아골타가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다.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서

기자는 또한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통일)한국이 '거란, 여진은 우리 민족이므로 그들의 역사적 강역 또한 우리 것'이란 식의 '대민족주의'로 무장하고 새로운 국가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중국 같은 이웃이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현실적 대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고려하다 보면 '저항적 민족주의'가 다시 필요한 시기라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주장만 고집하는 것은 '발톱까지 무장한' 패권주의 앞에서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말 / 김선영 기자 2004-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