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의 자주성 내세운 연호
군주 국가에서 어떤 왕의 통치시기를 나타내는 이름을
연호라고 한다. 연호는 보통 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이나 1년으로 하여, ‘○○ 몇 년’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한 명의 왕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연호를 바꾸거나 여러 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연호를 제일 먼저 사용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생각된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왕의 연호는 영락(永樂)이었다.
‘영원히 즐긴다’는 의미이므로, 고구려가 영원히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상들에 새겨진 글에 고구려 때
사용하였던 연호의 이름이 여러 개 나온다. 백제도 칠지도라는 칼에 새겨진 글을 통해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나라의 커다란 화평을 비는 마음에서 붙인 연호였을 것이다. 신라에서 연호를 사용하였음은 <삼국사기> 등을 통해 확인된다. 6세기 전반
법흥왕 때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7세기 중반 진덕여왕 때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도 7세기 말 나라를 세운 고왕 대조영 때 이미
연호를 정했으며, 8세기 초 제2대 무왕 때부터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진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무열왕 때부터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려에서는 태조, 광종이 일시적으로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지속되지는
않았다.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조선에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고종 말기에 들어서야 건양이라는 연호를 일시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에도 반란을 일으키거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들은 자신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연호를 내세웠다. 예컨대
신라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다툼에서 밀려난 다음 822년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은 독자적인 나라 이름과 함께 연호를 내세우고 있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우고 2개의 연호를 썼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고 고친 다음에는 연호도 고쳐서 다시 2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인종 때
봉기를 일으킨 묘청도 고려가 황제가 다스리는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주장하면서 독자적인 연호를 내세웠다.
이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연호는 원칙적으로 황제만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중국의 황제에 간섭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독립국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에게 시달리던 고종은 1897년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황제 자리에 오르는 한편,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이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임을 나라 안팎에 선언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중국의 지방정권이나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독립 국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한겨레신문 2004-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