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광개토대왕비문이 한글로 됐다면?

중국은 지금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의 하나였다고 우겨대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그네들의 오래 묵은 패권주의의 신호탄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정부는 특사를 파견하여 강력하게 항의했다. 국회의원들도 여야가 하나 되어 대책을 강구 중이며, 언론계는 언론계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대통령 격인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고구려사 왜곡의 주범으로 이른 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직접 지시해 놓고도 그것은 중앙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다. 엊그제 중국 외교부 차관이 찾아와 했다는 5개 항의 구두합의라는 것도 일을 저질러서 문제를 만들어 놓은 측이 “고구려사 문제가 중대 현안으로 대두된 데 유념한다”는 적반하장 격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현재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그러나 역시 한족(漢族)이 약 92%로 제일 강한 민족이다. 5호16국 시대, 요나라, 원나라를 비롯해 북방 민족이 현 중국 지역을 차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은 역시 한족의 나라였다.

가까이 청나라와 금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였다. 특히 청나라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통해 서쪽으로는 위구르와 티베트 지역까지, 북으로는 내몽골과 준가르, 남으로는 대만과 베트남, 미얀마 일부까지 경략한 대제국이었다.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점령했다가 물러갔다.

현재의 중국인들은 300년간 만주족의 식민지로 있었으나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 감사해야 한다. 한족이 세운 명나라 때보다 거의 2배나 넓은 영토를 확보해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을 세운 이들은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키자(滅滿興漢)’는 기치를 내걸면서도 만주족이 확보한 영토에 대해서는 고스란히 영주권을 주장했다. 지금 중국의 영토에 들어가 있는 티베트, 위구르 등 소수민족의 독립 시도가 끊임없이 문제 되는 것은 바로 그 대가이다. 이런 초강국을 세운 만주족의 언어는 지금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 만주족은 그 씨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리 되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만주족은 황실에서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기네 고유의 말과 문자를 무시하고 중국어와 한자를 공용어로 썼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된다. 즉 한 민족의 고유문자는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강한 무기 구실을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한족은 나라는 빼앗겼지만 말과 글자는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다시 정권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반대로 만주족은 정권은 잡았지만 자기네 고유의 말과 문자를 버렸기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만주족은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셈이 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주 벌판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문이 한글로 쓰여 있다면 중국은 감히 고구려를 자기 것이라고 우겨댈 수 없었을 것이다. 600년 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은 벌써 한족에 흡수됐을 것이다. 한글이 창제되자 최만리 같은 얼빠진 신하들은 “우리 조선에서는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서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새로 언문을 만들어서 스스로 오랑캐가 되고자 합니까?”하고 반대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오늘날 한자문화권 타령을 하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가? 한자는 이미 녹슨 창검과 같은 것이 돼 버렸으며 바퀴가 떨어져 나간 탱크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뜻글자인 한자는 하나의 기호처럼 된 지가 오래다.

중국 본토에서는 간자(簡字)라 하여 획수가 많거나 복잡한 한자는 죄다 간단한 글자로 바꿔치웠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 가면 간판이나 땅 이름이나 신문이 온통 간자로 돼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 갔을 때보다 더 불편하고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신문에서 “한글도 수출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중국의 어느 약소민족은 문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 한글로 글살이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중국의 서북쪽 우루무치에는 3년 전 조선족이 한글학교를 세웠는데 위구르족, 몽골족, 회족, 카자흐족 학생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폐일언하고 한 민족의 고유문자는 핵무기보다 더 강한 무기라는 것을 어찌모르는 것일까? 그러므로 한글운동은 단순히 한글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방위의 문제이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운동도 단순히 한글날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자는 문제가 아니다. 한글을 세계화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장>

(한국일보 2004-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