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대응 정공법으로

지난 24일 한ㆍ중 양국이 고구려사 왜곡문제(소위 동북공정)가 정치화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5개의 양해사항을 구두로 합의했다. 수천 년 간 계속된 한 ㆍ중 양국의 외교관계로 볼 때 특히 근래에 나타난 습관적인 저자세 외교에서 볼 때는 진전된 성과가 있다고 본다.

'동북공정'은 중국 최고지도부의 국가정책이었던 만큼 일보의 후퇴도 없을 것 같았는데, 외무부의 정공법과 국민의 강한 반발이 주효해서 완전한 KO패는 면하면서 판정패로 탐색전은 끝난 것 같다. 그런데 이 합의사항이 지닌 문제점은 적지 않다.

우선 구두 양해각서이므로 가변성이 있다는 점이고, 그 실체인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단어는 물론 그것과 관련된 향후의 방침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최소화한 다는 것이며, 마지막 5항에서는 학술교류를 조속히하자고 되어 있다.

우리는 정부 당국자와 일부 역사학자 등을 비롯해 대부분은 이번 사건을 역사 왜곡, 특히 고구려사만의 문제로 인식하고 안이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중국 내 의 고구려 역사유적이 유네스코에 등재되고 난 이후에도 더 심화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학술문제를 뛰어넘는 정치문제이며,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번 역사왜곡 작업은 드러났다시피 중국 최고지도부의 결정사항으로 국가기관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건이다. 체제의 혼란, 소수민족들을 압박하기 위한 중국 내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전환기에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고 신중화제국주의를 실현시키려는 일종의 국가발전전략이다. 크게는 추후 열강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있는 만주지역이 중국의 현실적인 영토뿐만 아니라 역사영토였음을 국내외에 과시하려는 명분을 축적하는 작업이며, 작게는 간도 연해주 등 영토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그야말로 다목적 포석을 지닌 중국으로서는 매우 비중 높은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추진된 사업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은 두 나라 간에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지 학술적으로 끌어가면서 시간을 보내자고 유야무야할 사항은 아니다.

특히 중국은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놓고 그 근원, 계통성, 영토 등 다양한 각도에서 치밀하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한 중국의 주장을 전제로 놓고 우리 학자들이 순수한 학술외적인 교류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독도문제처럼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국은 일단 이론적 근거도 박약하고 현실성 없는 가장 강력한 카드를 내놓고 있다가 우리 입장을 수용하여 양보하는 척하는 전술을 구사하는데, 우리가 이해를 구하거나 타협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만약 이 안과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이 몇 달 동안 중국측에 기만 당한 채 이유없이 흥분한 꼴이 되고, 앞으로 역사학자들을 제외한 국민들은 발언하거나 행동할 명분을 상실하게 된다. 일종의 전선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전망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정치인들은 물론이지만, 특히 현실 인식에 둔감하고 정치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된 역사학자들이 중국의 심모원려한 전술에 말려들까 매우 우려된다. 또한 그 동안 잠잠한 채로 몸을 낮추고 있던 친중파들이나 '탈민족주의' '국사 해체론'을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보편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전개되고 있는 국내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하고, 협상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세계 질서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앞으로 3~4년 후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동아시아의 신질서 속에서 일본 러시아, 특히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우방으로 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진다. 그 동안 한국인들은 현실을 망각한 채 중국에 턱없이 우호적이었고 아량을 베풀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하여 지금처럼 '중국위협론'이 한국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적대적인 감정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면 중국에 매우 불리하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와의 상생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다양한 카드로 역제의 하면서 강력한 정공법을 계속 구사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북공정 작업의 무효 선언뿐만 아니라 고구려 외에 고조선 발해 고려 등 역사왜곡 일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번 사태가 역사전쟁인 만큼 대응자세도 내부적으로 정리하여 국가생존 차원에서 중장기적으로 전략전술을 수립하고 총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국민들은 자민족의 역사가 바로 집단의 미래 및 생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역사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 한다. 정치인들은 집단의 정체성이 자국의 운명과 얼마나 직결되었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이번 사태에 가장 책임을 통감해야 할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이다. 근대사학이 지금까지 지녀온 현실에 대한 투항자세와 민족생존에 대한 방관자적인 태도를 반성하고, 연구 오류에 대한 자기고백을 해야 한다. 나아가 보다 현실적인 역사 , 미래지향적인 역사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 의해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찾는 연구방식과 사관을 적극적으로 계발해야 한다.

<윤명철 동국대 한국사학과 교수>

(매일경제 2004-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