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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중국의 약속 믿을만한가
드디어 고구려사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이날은 한.중 수교 12주년 기념일이었다. 아침 신문마다 실린 중국
특집에서는 예년과 달리 우호적인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의 역사 왜곡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나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이 간다. 이는
중국에도 큰 손실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타결은 양국 간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태산을 조금이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번 합의 내용은 대체로 두가지다. 첫째는 고구려사 문제에 중국이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학술교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모두 미봉책에 불과한 미심쩍은 약속일 뿐이다.
필자는 이미 4년 전 중국의 교과서와 사전에서 고구려를 한국사로 서술한 부분을 지우라는 지침이 내려진 사실을 들었다. 중국 정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은밀하게 고구려 문제에 손대기 시작했던 것이고, 그 뒤에 등장한 동북공정은 단지 표면에 떠오른 사업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정부의 개입을 부인하고 학술적 차원의 문제라 해명해 왔고, 우리 정부는 순진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이번에 정부 특사가 파견되어 합의한
것도 이 문제의 근본 성격이 정치적 사안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지난 2월 왕이 부부장과 합의한 내용도 7월에 깨지고 말았던 전례가 있으니, 이번 양해 사항도 언제 다시 파탄날지 모를 일이다.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번 합의는 중국 당국에서 앞으로 더욱 내밀하게 추진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과도 연계되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학술교류도 문제다. 학술 차원에서 풀어가야 한다면서 중국 당국에서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개최하는 학술회의에 학자들을 내보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어느 노학자가 일본 대학에서 발해사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출국도 못했다. 이렇게 문을 걸어잠그면서
학자들이 해결할 일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8월 초 중국을 방문했다가 동북공정 소식지를 발견하고 내용을 들여다 보니 내가 쓴 글을
반박하는 논문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복사 좀 하자고 했더니 내부열람용이라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 이런 폐쇄적 태도로 어떻게 개방적인 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이번의 타결로 연구자 간에 일시적인 내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학술교류 협정을 맺어 지속적인 교류의 발판이 마련되지 않으면 전시적인
사업에 그치고 말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 연구자들은 만주땅에서 남의 눈에 띌까 도둑질 하듯 유적지를 돌아다니고 있다. 유적의 공동 조사는
고사하고 발굴 현장마저 접근할 수가 없다. 중국의 한 박물관에 들렀더니 관장이 대뜸 고구려 유적은 가지 말라고 했다. 이런 자폐적인 상황에서
학술교류와 학문적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아울러 이번 협상 과정에서도 불거졌듯 섣부른 민족주의는 역풍만 불러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일본인이 독도에 올라 자기네 땅이라 외치는
꼴을 볼 수 없듯이, 만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상대를 존중하며 냉정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책으로는 학자를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 이 방면의 연구자가 적은 것은 취직도 문제려니와 자료 구입이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의 연구실은 책으로 가득 차 골치를 썩이고 있다. 이처럼 개인마다 자료를 사모으고 있으니 얼마나 낭비인가. 지금까지
중국에서 연구된 성과들을 집대성해 보급하는 사업이 시급하다. 자료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어야 연구자가 자라날 수 있다. 저간의
사건들은 우리가 중국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송기호 /
서울대 교수,국사학>
(중앙일보 200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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