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모르는 교실, 고구려 빠진 연구실

국학운동시민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사직공원에서 열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규탄 집회’에서 고구려 군사 복장을 한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태성 기자 "서울대를 노리는 최상위권 학생을 빼고는 국사를 선택하지 않아요. 외워야 할 게 많고 점수 따기도 힘들거든요."

오는 11월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서울 휘문고 김인성(18)군의 말이다. 김군 역시 수능에서 국사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 근현대사'를 골랐다. 근현대사의 학습 분량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김군은 "인문계 학생은 사회탐구 영역 11개 과목 중 보통 4개를 고르는데 대부분 국사 과목을 피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등 국사를 대입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대학에 들어가려는 학생을 빼고는 굳이 어려운 국사를 고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6월에 수능 모의평가를 치른 수험생 54만명 가운데 국사를 택한 학생은 14만명에 불과했다. 반면 한국지리와 사회.문화는 각각 21만명, 19만명이 선택했다. 한국 근현대사는 17만명. 세계사는 고작 3만명에 그쳤다. 교실 현장에서 국사의 비중이 지나치게 낮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인문계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자연계 학생은 올해 수능시험부터 사회 과목을 전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 고교생의 절반 이상이 국사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은 현재 고교 3학년부터 적용된 제7차 교육과정 때문이다. 그전까지 중.고교 필수과목으로 지정됐던 국사는 현재 윤리.정치 등 다른 과목과 함께 사회영역에 통합된 상태다. 고교 1학년 때는 공통기본(필수) 과목으로 배우지만 그나마 근대(개항) 이전까지만 다루며, 2~3학년 때는 한국 근현대사.세계사.한국지리 등과 함께 선택과목으로 공부한다. 수요자(학생) 중심의 수준별 학습과 교과 선택권 보장을 뼈대로 하는 7차 교육과정에서 국사가 '전(前) 근대'와 '근대 이후'로 단절된 것이다.

최근 서울대 동원생활관에선 역사교육 전공 교수 7명과 현직 역사교사 4명이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세계화 시대의 한국 역사교육의 방향과 과제'를 놓고 토론한 이 자리에서도 참석자들은 역사교육의 파행을 집중 거론했다. 역사가 사회과목에 통합되고, 국사가 전근대와 근현대로 갈라지고, 국사와 세계사가 별개로 나눠진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배재고 이헌주 교사는 "국사를 전근대와 근현대로 분리해 전자는 필수로, 후자는 선택으로 배정한 것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며 "무엇보다 사회탐구에 포함된 역사 과목을 독립하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앙일보가 지난 17일 20대 이상의 성인 남녀 826명을 여론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4%가 '국사가 사회영역에 통합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반면 '국사의 교과 독립'과 '필수과목 지정'에는 각각 84%, 90%가 찬성했다. 교육 현장과 일반인 인식 사이에 큰 격차가 있는 것이다.

서울대 양호환(역사교육) 교수는 "3년 전부터 여러 학술대회에서 제도 개선을 요구했으나 교육부에선 별 반응이 없다"며 "중학교.지방 고교에선 비전공자가 역사를 가르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대 한영우(한국사) 명예교수는 "국사 교육을 강화한다고 국수주의자를 만드는 건 아니다"며 "분단 극복 등 민족적 과제가 많은 상황에서 무너진 역사 교육을 하루빨리 바로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김창호 학술 전문위원, 신창운 여론조사 전문위원,박정호.배영대.조민근(이상 문화부).하현옥(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2004-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