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없다

미국 LA에서 동북쪽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을 맞아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한 자그마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잠시 쉴 곳을 찾는데 바로 근처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주민도 많지 않은 곳에 공원이라니’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한바퀴 돌고 나오다 깜짝 놀랐다. 입구 간판에 일본정원이라고 쓰여있는 게 아닌가. 간판 아래에는 조그만 글씨로 일본의 지원으로 공원을 만들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었다.

며칠후 뉴욕에서 다시 ‘일본’과 만났다. 한 건물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자 중년의 한 백인 아줌마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일본사람이냐’고 묻고는 상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얼마전 소니TV를 샀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래전부터 소니를 갖고 싶었는데 이제야 한을 풀었다는 투의 너스레를 떨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 일행중 한 명이 ‘우린 한국사람이야’라고 짜증섞인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 백인 아줌마는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고 ‘일본인’과의 짧은 만남을 못내 아쉬워하며 사라져갔다.

－국가홍보 열올린 대국들－

한·중 역사전쟁이 본격화된다는 와중에 맨 먼저 떠오른 게 10여년 전 미국여행 단상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없고 ‘일본’만 있었던 셈이었다. 이런 판에 한·일간의 역사전쟁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미 결판이 나있는 건 아닐까. 사실이 그렇다. 한국 바로알리기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반크의 조사에 따르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곳이 유엔은 물론 미국 CNN방송과 CIA, 그리고 하버드대 연구소 등이 포함돼 있다. 세계의 정보중심지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언론, 정부기관, 대학이 이럴진대 다른 곳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왜곡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다. 미국 고교생들이 보는 세계사 교과서에는 고구려·고려·조선이 중국의 일부로 버젓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니 중국정부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왜곡쯤이야 식은죽 먹기 정도로 치부했음직하다.

미국인들이 전쟁의 상대로 피를 흘리며 싸웠고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는 판에 일본을 우호적인 나라로 받아들인 것은 불가사의가 아니다. 전후 전쟁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일본 정부가 기업·언론과 함께 펼친 노력의 결과다. 일본은 전후 국제교류기금을 통해 친일 학자를 길러내는 한편으로는 미국에는 일본정원을 세우고 영국에서는 일본전통문학의 하나인 하이쿠모임을 지원하는 등 다각도로 세심한 홍보전략을 펴왔다.

패전국인 독일 역시 국가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괴테인스티튜트를 첨병으로 내세워 76개국 128개처에 설립한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홍보는 패전국만의 전유물은 물론 아니다. 프랑스는 이미 1883년부터 알리앙스 프랑세스를 설립, 220여개국 1,300여개소를 통해 문화대국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것도 부족해 127개국에 세운 문화원에서 현대 프랑스를 소개하는 등 적극적이다. 미국은 90년대 축소된 해외홍보 예산을 9·11 사태 이후 대폭 확대하면서 아예 백악관내에 세계홍보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우린 쪼개지고 낮잠자고－

세계 강대국마저 팔을 걷어붙이고 국가홍보를 위해 이처럼 전력을 쏟아붓는 데 우리야말로 적은 해외홍보 예산마저 대통령 중심의 정권홍보에 열을 올렸으니 한국사 왜곡에 딴나라만 비난할 일도 못된다. 그나마 뒤늦게 문을 연 한국문화원은 2개 부처로 갈라지고 정부와 해외진출기업 등의 민간단체는 따로따로인 채 2년전 출범한 ‘국가이미지 제고 위원회’는 낮잠을 자고 있다. 한·중·일 역사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제3국을 향한 싸움이다. 세계에 ‘한국’이 없는데 한·중·일 싸움에서 이긴다한들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경향신문 / 이상문 논설실장 2004-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