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정의 국내성 방문기

진이정은 1993년에 서른네 살 나이로 요절한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사위어 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개화시키지 못한 재능의 한과 성장기의 어두운 기억들을 애절하면서도 지성적이고 신랄하면서도 감동적인 언어로 펼쳐내 시집 한 권을 남겼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라는 기이한 제목을 달고 있는 시집이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 뒤의 세계를 꿈꾸는데 시인 자신은 벌써 죽음 뒤로 넘어가 이 세계를 꿈꾼다는 뜻으로 대략 이해될 수 있는 제목이다.

시집 속에는 바로 이 제목에 아리비아 숫자로 번호를 붙인 시가 몇 편 들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4’에서는 조금 웃고 많이 울게 만드는 이야기 한 토막을 읽게 된다. 꿈에선가 생시에선가 그는 어디에 갔는데 고구려의 국내성이었다. 고구려 병사가 그의 국적을 물었다. “전 허망한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더니 다행히 말이 통했다. “나도 허망한 나라에 살고 있어.” 착한 고구려 병사가 이렇게 대답하며 그를 봐주더라는 것이다. “어디에나 인간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또 울었고, 국내성을 향해 절을 했다고 그는 썼다. 진이정은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생명을 바쳐 옛 조국의 멸망을 애도하려 했던 것일까. 한 때 영화로웠던 역사의 무상함을 마음에 새겨 자신의 불운을 위로하려 했던 것일까.

중국 사람들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전쟁을 벌여 고구려사를 자기 나라의 역사 속에 편입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문득 떠오르게 된 것이 진이정의 이 시이다. 고구려를 중국이라고 이름 붙여 버리면 진이정과 국내성 병사 사이에 통했던 말이 끊어질까. 그 착한 고구려 병사가 갑자기 살인귀가 될 것인가. 그 때도 국내성에 절을 할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실없는 생각이지만, 중국의 어떤 불우한 젊은이가 자신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을 동일시할 수 있을지는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인이 누구인지는 바로 그것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도 쓰고 문화비평도 하고 정치평론도 했던 발레리는 어떤 글의 주석으로 ‘유럽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유럽인은 어떤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거나 어떤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유럽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제도의 보편성, 기독교로부터 종교와 양심의 보편성, 헬레네 문명에서 학문과 진리의 보편성을 물려받았다. 유럽인이란 이 세 가지 보편성 아래서 자기의 행동을 결정하고 자기 존재를 규정하는 사람들이다. 유럽의 역사가 유럽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살아 있는 문화적 전통이 거꾸로 유럽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발레리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국인을 만들어낸 커다란 요소의 하나로 중국에서 전파된 유교를 꼽지 않을 사람도 없다. 유교를 말하지 않더라도 중국이 우리에게 미친 문화적 영향은 매우 크며, 중국 또한 인접국과의 교섭에서 끌어들인 문화적 요소가 적다고 할 수 없다. 한자문화만큼 모든 것을 흡입하여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용광로 문화도 드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동양적 보편성을 만들어냈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책봉과 조공 같은 것으로 과거의 역사를 규정하려 든다면 그 역사는 도대체 어떤 것이 될까.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자기의 의사에 의해서건 관의 명령을 받아서건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 나라의 역사 속에 끌어들이려 하기 전에, 한 나라의 역사를 빛나고 영예로운 문명사로 만들 것인지, 탐욕스런 민족의 침략사로 만들 것인지를 먼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 문화를 보고 있는 곳에서 그들이 종족적 특수 이익을 보고 있다면 불행한 것은 그들일 것이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국민일보 2004-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