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심 치욕’ 한국 뒷북대응

아테네올림픽 남자 기계체조 개인종합 오심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금메달을 가져간 미국 내에서조차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고 한국은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소청을 내는 등 금메달을 찾아오기 위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이와 관련, 국제체조협회(FIG)은 양태영(한국)의 평행봉 스타트점수를 10점이 아닌 9.9점을 준 것은 오심이라고 인정하고 해당 심판 3명을 징계했다. 하지만 “한국 선수가 제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 번 내려진 판정은 번복할 수 없다”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상황.

이에 따라 한국이 빼앗긴 금메달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차제에 한국 선수단의 초기대응이 적절했는지, 오심 사례와 스포츠 강국 미국의 입김, 한국 스포츠 외교의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 초동대응 적절했나 = 양태영(경북체육회)이 체조 남자 개인종합 결승에서 오심 때문에 금메달을 놓친 것과 관련, 초동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양태영의 평행봉 종목 스타트점수에 대해 해당 종목이 끝난 뒤 즉각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것이 이같은 사태를 빚었다고 체조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당시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면 스타트점수가 정정됐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양태영이 최종 점수에서 미국의 폴 햄을 0.051점차로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

이주형 코치는 “다음 연기를 하기 전에 이전 경기 결과를 놓고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감점을 받을 수 있어 억울해도 참았다”고 말했지만 이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체조 규정상 경기 진행 도중이라도 서면을 통해 기술위원장에게 심판판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실제 이런 과정을 통해 점수와 순위가 뒤바뀐 경우가 드물지 않다.

2001년 11월 벨기에 겐트에서 열린 세계체조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은 남자 단체전 예선에서 이장형이 안마에서 스타트점수 10.0점짜리 연기를 펼쳤지만 9.6점으로 판정하자 즉각 이의를 제기해 판정 번복을 이끌어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도 남자 개인종합 우승자 양웨이(중국)도 마루운동에서 9.05점의 저조한 성적이 나오자 스타트점수에 이의를 제기해 9.3점을 받았다.

체조 관계자는 “해당 종목이 끝난 뒤 바로 이의를 제기하면 스타트점수가 정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이의제기를 하면 정정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FIG 고위 관계자도 “점수에 이의가 있으면 다음 연기가 끝나기 전에 심판에게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해 곧바로 문제를 제기했을 경우 정정이 가능했음을 시사했다.

한국 선수단은 폴 햄(미국)이 철봉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쳐 금메달이 확정되자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초동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

김팔모 대한체조협회 사무국장은 “5번째 종목인 평행봉까지 양태영과 김대은이 1,2위를 달리고 있는데다 양태영이 철봉에 강하기 때문에 (충분히 금메달이 가능하다고 보고) 평행봉 스타트점수에 대해 소홀히 생각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 왜 자꾸 한국이 피해입나 = 심판들의 무책임한 판정이 올림픽을 망치고 있다. 특히 미국 등 스포츠 강국을 이롭게 하는 노골적인 편파판정과 오심은 올림픽을 정치의 장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한국은 올림픽 무대에서 미국만 만나면 오심의 피해자가 돼야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500m 결승에서 김동성이 미국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금메달을 빼앗겼던 사건. 오노 파문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한국내 반미감정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심판들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되는 구기종목의 피해사례는 이보다 훨씬 심하다. 한국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야구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도 오심으로 2대3으로 역전패했다. 한국이 2-1로 앞서던 7회말 1사후 미국의 마이크 킨케이드가 3루수쪽 기습번트를 대고 뛰었다. 누가 보아도 1루에서 아웃되는 상황이었지만 심판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오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킨케이드는 후속타자의 안타 때 3루까지 뛰었다. 이 역시도 완벽한 아웃이었지만 3루심마저 세이프를 외쳤다. 당시 미국 기자들조차 “킨케이드는 두 번 죽었다(He was out again)”고 말했을 정도. 킨케이드는 득점에 성공, 동점을 이루며 승부의 물꼬를 돌려 놓았다. 미국의 AP통신은 이날 경기를 보도하며 국제야구연맹(IBA)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미국의 검은 입김이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108년 만에 근대올림픽의 발상지로 돌아왔다는 이번 아테네올림픽도 오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말리 축구 조별리그 최종전 심판은 말리 공격수의 명백한 핸들링 반칙을 보지 못하고 골을 인정했다.

수영 남자 배영 200m에서 애런 페이솔(미국)이 금메달을 땄으나 심판은 턴 동작이 규정을 위반했다며 실격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불 같은 항의가 이어지자 국제수영연맹(FINA)은 30분 뒤 판정을 번복하고 페이솔을 우승자로 확정했다. 은메달을 딴 오스트리아와 4위 영국은 FINA에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승마 종합마술 단체전에서는 우승국이 번복되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회조직위는 독일의 우승을 발표했으나 심판이 벌점을 주지 않았다는 2위 프랑스의 항의를 받아들여 독일의 우승을 취소했다. 그러나 독일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조직위는 독일을 우승팀으로 재결정했다. 일부 종목에서 주최국 그리스에 유리한 판정이 이어지는 것도 올림픽 정신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스포츠 외교에 문제있다 = 한국 스포츠 외교가 아테네올림픽에서 오심 판정으로 모욕을 당하고도 늑장대응, 대안부재로 망신살을 뻗치고 있다.

한국 선수들의 기량은 세계 10위권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야 할 스포츠 외교는 전혀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FIG의 오심 인정 이후 여론이 들끓자 선수단은 뒤늦게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소청키로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엉터리 판정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고 금메달을 빼앗긴 한국 선수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감독과 코치를 비롯해 선수단과 대한올림픽조직위원회(KOC) 관계자 어느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별 문제 없이 성숙하게 대처했다는 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들었다. 그러다 FIG의 오심 인정 이후 미국 언론들마저 ‘빼앗긴 한국의 금메달’을 동정하고 나서자 뒤늦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전형적인 ‘뒷북치기’다.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페어부문에서 판정논란이 확산되자 캐나다와 러시아가 금메달을 공동수여했던 전례가 있다. 또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에서 심판이 캐나다 실비에 프레쉐트의 점수를 잘못 채점해 미국의 크리스텐 밥 스프래그가 금메달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심판진은 판정번복은 없다고 못을 박았지만 국제수영연맹이 1년 뒤 심판판정의 실수를 이유로 프레쉐트에게도 금메달을 주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스포츠 외교는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의 몰락 이후 대안부재와 시스템마비에 시달리며 국제무대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와 KOC는 올초 ‘포스트 김운용’ 대책으로 ‘스포츠 외교인력 양성 방안’과 ‘시스템외교, 다면외교’ 등을 발표했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효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물론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활약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게 하루 이틀 걸리는 문제도 아니고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스포츠외교인력 양성방안이라는 것이 고작 금메달리스트 출신에 대한 어학연수비를 지원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걸 보면 정부의 공언은 알맹이 없는 말의 성찬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아테네에는 이연택 KOC 위원장과 이건희 IOC 위원,박용성 IOC 위원 등 한국 체육계를 대표하는 고위 인사들이 대거 머물고 있지만 전혀 외교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재우, 라동철, 전석운, 하윤해기자>

(국민일보 2004-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