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싸울 칼 있으면 녹여 쟁기 만들라’

한나라당, 민노당, 민주당, 자민련 등 야4당이 정부·여당의 민생경제 살리기에 적극 협력할 뜻을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념과 정체성이 서로 다른 각 당에서 경제난 해법이 다르게 나오리라는 것은 예견한 바이다. 하지만 야4당은 모두 정책의 불확실성과 정부의 안이한 현실인식을 질타하며 경제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야권의 생각이 이렇게 비슷하면 여당과의 협조가 이뤄질 경우 난국을 의외로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열린우리당이다. 야당이 경제상황을 부정적으로 끌고간다 해서 국민대토론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한심한 노릇이지만, 꼬여있는 현안들을 풀겠다는 의지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오는 30일 별도의 대토론회를 추진 중이라고 하니 경제살리기를 놓고 주도권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청와대와 여당에서 민간 연구기관들이 경기지표를 비관적으로 해석해 시장심리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지만 체감경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유가가 성장잠재력을 훼손시켜 스태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일자리는 지난달에만 7만개가 사라져 실업자가 쏟아지고, 매기가 뚝 끊겨 문을 닫는 업소들이 속출하고 있다. 오죽하면 중소기업 사장이 정치권을 향해 서로 싸울 칼이 있으면 녹여 쟁기를 만들라고 하소연을 했겠는가.

경제난에 대한 책임은 어차피 여당이 져야 한다. 야당이 제기하는 위기론이 못마땅해도 함께 끌고가며 최선의 길을 찾아내는 게 올바른 자세이다. 그래야 정부의 잘못도 호되게 꾸짖고 바로잡을 수 있다. 경제살리기마저 정쟁거리가 된다면 더이상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야당은 물론 온 국민의 역량을 민생경제 회생에 모으는 것은 여당 하기에 달려 있다.

(경향신문 2004-8-20)

[사설]“칼 녹여 쟁기 만들라”가 민심이다

민생의 암담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경제 살리기에 전념해 달라는 호소가 그제 4개 야당이 공동 주최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토론회’에서도 어김없이 쏟아졌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중소기업의 65%가 3년을 버티기 힘들다”면서 “정쟁(政爭)의 칼을 녹여 생산을 위한 쟁기를 만들어 달라”고 촉구했다.

이 기업인의 소리는 권력 투쟁과 정치적 사익(私益) 지키기에 몰두하는 정치권 및 정치화된 이익집단, 그리고 국가체제를 변질시키려는 무리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의 민성(民聲)이라고 본다. 숱한 여론조사 등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된 이 같은 민심을 외면하는 정부와 국회는 참여정부도, 국민의 국회도 아니다.

중국 일본 등의 과거사 왜곡에는 국론을 모아 대처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의도가 뻔한 과거사 내전(內戰)에 ‘올인’하고, 국민의 60%가 반대하는 수도(首都) 이전 강행 등으로 사회를 분열과 갈등의 수렁으로 몰아넣을 때 무너지는 것은 민생이요, 국가경쟁력이다.

각종 경제지표가 보여주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난관은 온 나라가 지혜와 힘을 모아도 극복을 장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5% 늘었다지만, 불과 2.2% 성장에 그쳤던 작년 2분기와 비교한 데 따른 수치상의 반등 효과가 크기 때문에 결코 안심할 성적이 못된다. 체감경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민간소비는 0.7% 감소해 5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냈다. 이런 추세라면 소비증가-투자증가-생산증가-고용확대 등의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최근의 물가와 유가 동향을 보면 저성장 고물가의 스태그플레이션 장기화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여당이 몇 가지 단기부양책만으로 할 일 다 했다는 듯 과거사에 매달려서는 벼랑 끝에 선 경제를 회복시킬 수 없다.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라”는 국민의 호소 뒤에는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정부여당은 깨달아야 한다.

(동아일보 2004-8-20)

[로터리]대통령의 약속

법은 상식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일상사를 지배하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인 상식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이를 지킬 것을 약속한 것이 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약속은 그것이 상식의 범주 안에 있다면 법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법과 약속에 차이가 있다면 법은 지키지 않을 때 처벌을 받고 약속은 지키지 않을 때 지탄을 받는 점일 것이다.

이렇듯 약속은 법과 동일한 가치로 존중돼야 하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무법천지와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의 약속. 국가 최고통치자로서의 약속은 어떤 종류의 약속이라도 종국에는 국민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만큼 반드시 지켜져야 함은 두말할나위가 없다.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약속의 크기만큼 국민은 박탈감을 느낄 것이며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 약속을 경시하는 도덕적 혼란을 가져올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국민의 준법정신이 해이해지는 것과 같은 논리다. 따라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대통령의 약속이 실천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6월18일 이례적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보고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경제부처 장관과 국회의원 및 전경련회장단을 비롯한 중소기업 대표들과 학계ㆍ노동계ㆍ시민단체 대표들 앞에서 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위해 대기업들이 적극 투자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또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 완화와 관련해 환경과 노동인권 보호를 위해 필요한 규제는 지켜나가되 풀 것은 확실히 풀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껏 규제가 속 시원하게 풀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재정경제부나 공정거래위원회ㆍ국무조정실을 비롯한 어느 부서도 대통령의 약속을 뒷받침하는 시원한 후속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여당이나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ㆍ15 광복절 기념사에서 노 대통령이 과거사 진상특위구성과 국가기관의 과거사 정리를 언급하자 국가정보원과 국방부에서 즉각적이고 경쟁적으로 이에 호응하고 나왔다. 가뜩이나 행정수도 이전 등의 각종 국정 현안들로 국론이 분열돼 있는 마당에 또 다른 국론 분열이 예상되는 과거사 진상조사 특위 구성에 다투어 앞장서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의 약속이 지니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가벼운지 그저 놀랄 뿐이다. 민생경제를 살려보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으면서 한가하게 과거사 들추는 일에 신명을 내는 것을 보며 약속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서울경제 2004-8-19)

"정부가 경제회생의 중심에 서야 한다"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보다 명확한 국정운영 방향 제시와 일관성 있는 정책추진이 요구되고 있다.

하반기 이후 경기회복을 자신했던 정부가 재정지출 확대와 금리 인하 등 적극적인 경기부양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경기진단과 예측능력, 이를 근거로 한 정책대응 능력에 근원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서울대 이승훈 교수는 무엇보다 재벌개혁이나 노동정책 방향 등에 대해 정부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A는 분명하지만, B일지도 모르고 C가 될수 도 있는 나라에서 누가 투자하겠냐"며 "위험높은 곳에 절대 투자가 없고 위험은 변덕스런 정부에 항상 있다. 일관성 없는 정책은 투자를 절대 불러 올수 없다"고 지적했다.

수도이전을 둘러싼 논란과 과거사 갈등, 색깔논쟁 등 정부와 정치권 안팎에서 불거지는 경제 외적인 이념논쟁 역시 경제 불안심리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장 시급한 것은 경기를 활성화시켜 5%대의 잠재성장을 유지함으로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또 근본적으로는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인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개발과 노동, 교육개혁 등을 통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해야 한다.

경희대 권영준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성장을 통해 분배가 이뤄지는 경제성장의 선순환구조를 회복시키고 10년 뒤 우리 경제의 먹거리를 찾는게 최대과제"라고 말했다.

권교수는 또 "온갖 것들은 다 벌려 놓으면서 동네 방네 싸움이나 하고있다면, 국민들이 기억하는 건 5년동안이나 싸움이나 하다 끝난 정부로 평가할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소득은 소득대로 떨어지고, 경기는 경기대로 나빠지고, 빈부격차는 격차대로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여정부 스스로 제시한 10대 성장동력 산업가운데 한 두개라도 확실히 지원해 성과를 내는 등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노컷뉴스 / 권혁주 기자 2004-8-17)

[사설]역사도 국민도 국정도 다 갈라세우나

“서울에서 매일 서울의 이익을 생각하는 강남 사람과 아침 점심 먹고, 차 마시면서 나온 정책이 분권적 균형발전 정책이 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20일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강원지역 혁신발전 5개년계획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보도다.

대통령의 이런 극단적인 분열적 언어 구사를 또 비판해야 하는 현실에 참으로 숨이 막힐 것같다. 툭하면 국민끼리 ‘이북 사람 ’ ‘이남 사람’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이라며 서로 낙인을 찍어온 것이 바로 지역감정이라는 것인데, 이젠 대통령까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남 사람’이라는 용어로 서울 사람을 두 토막으로 나누고 있다.

그 ‘강남 사람’은 서울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수도이전에 반대한다는 그 기막힌 논리의 비약과 거친 조어술(造語術)에 역설적 의미에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국회 시정연설에서는 부동산 투기문제에 언급하면서 “‘강남 불패(不敗)’라 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하더니, 어떤 TV좌담회에 나가서는 “강남 불패라지만 그에 관한 한 대통령도 불패가 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불패’라는 용어도 모자란듯 ‘강남 사람’이라는 표현 까지하며 특정지역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이부영 당의장은 과거사 재조명 문제와 관련해 “가해자는 피해자를 조사할 자격이 없다”며 명색이 집권당 당의장이 국민을 가해자·피해자로 확연히 나누고 있다. 그러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생유전에 대해 거칠것 없이 악담에 가까운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의장이야말로 적어도 현 정치권 안에서는 ‘변절의 역사’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 한나라당을 그렇게 욕하다가 한나라당에 들어가선 무려 6년동안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원내총무, 부총재 까지 지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까지 출마했고, 두 차례 대선 땐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외치며 전국을 돌다가 이번엔 열린 우리당으로 가서 역사청산을 주장하고 있다. 얼마전엔 역사 재조명 대상에서 박 전 대통령을 빼자고도 했다. 이 의장은 자신의 ‘개인사’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문화일보 2004-8-21)

정치인들이여 침묵하자

정확히 30년 전인 1974년 법정스님은 ‘침묵의 의미’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법정의 저서 ‘무소유’에 실려 있다는 것쯤은 아마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고 말은 오해를 동반한다고 스님은 적고 있다. 또한 “우리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간다”고 꼬집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글은 세상살이를 보는 좋은 잣대가 될 법하다. 10대들은 욕설로 대화를 채우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어른들은 끊임없이 막말과 상소리를 내뱉는다. 배울 게 뻔하다. 이 나라 정치지도자와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상생’과 ‘통합’을 외쳐대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는 ‘대립’과 ‘갈등’, ‘분열’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정치인들은 ‘미래’를 논의하기보다는 과거를 ‘밑천’으로 삼아 천박한 권력투쟁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다. ‘굿판’이라는 해묵은 단어와 ‘전선’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입으로는 경제와 국가경쟁력을 말하고 혁신과 지방분권을 설파하지만 정치투쟁의 수단이 아니냐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쪽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정치권은 ‘과거사’라는 유령에 얼이 빠져 ‘친일’칼과 ‘친북’칼을 서로 겨냥하며 사생결단의 싸움에 주저없이 뛰어들고 있는 게 요즘의 ‘슬픈 현실’이다. 자신들을 뽑아준 고통받는 유권자들은 안중에 없고 그들의 눈으로 보는 ‘정치적인 해법’만이 나올 뿐이다. 이러니 네티즌과 언론이 정치인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행적을 캐고 다니고 족보를 뒤지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중도하차도 그 근인을 따져보자면 ‘과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물론 부친의 친일행적을 ‘거짓말’과 ‘말바꾸기’로 일관하다 드러난 ‘진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말을 바꾼 사람이 그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 국민들은 잘 안다. 행정수도 이전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꾼 예도 있고 수도이전을 찬성했다가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말바꾸기, 실언은 정치인과 그가 만드는 법안의 신뢰성을 갉아먹는 주범이 된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미국 존 F 케네디 정책대학원 공공정책 분야 교수인 개리 R 오렌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상실’이라는 논문에서 정치지도자의 도덕성 상실이 국민신뢰를 잃게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정치지도자들의 도덕적 이미지는 직업적인 표리부동함과 상스러운 언동에서부터 개인적인 경솔함과 유약한 인품, 그리고 공공연한 부패에 이르는 일련의 행태들에 의해 여지없이 실추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실언과 말바꾸기는 언론의 ‘비방’보다 더 확실하게 신뢰를 갉아먹는다. 거친 말과 오해를 낳을 법한 말보다 정련·절제된 말을 하도록 해보자. 법정스님의 충고대로 ‘흩어진 인간을 결합하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는’ 당당한 말을 하자. 그것을 위해 침묵하자.

(파이넨셜뉴스 / 박희준 정치경제부 차장 2004-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