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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美親中’ 외친 힘센이 누구였나
서울올림픽이 끝난 다음해인 1989년 9월.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서울을 떠나 베이징에 도착해 1박한 뒤, 다음날
‘털털거리는’ 중국 민항기로 옌지(延吉)공항에 도착 다시 1박하고, 또 그 다음날 먼지나는 길을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서 백두산 어귀에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한·중수교(1992년) 이전이고, 중국 동북3성(省)에 한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시작되던 초기라 교통편, 숙박시설 모두 그저
그러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그러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자작나무 숲이 초행길의 이방인들을 압도했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명산이
있었구나.” 잠시후, 백두산 정상에 서서 눈발이 날리는 속에 ‘시퍼런 천지’를 내려다볼 때는 감격스러움에 40~50명의 동행자들 모두 넋을
잃었다. ‘한민족의 뿌리’ 백두산, ‘한민족의 젖줄’ 천지, 그 정상 위에서 “우린 한민족이다”란 생각에 전율이 일었다. 사과·과자 등으로
제상을 차려놓고, 백두산과 천지를 향해 소주잔을 올리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부를 때는 모두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그후 돌아본 압록강 철교, 한동주 등 독립투사들이 활동했던 땅 용정(龍井), 혜란강…. 아, 거기엔 너무나 익숙한 ‘고향의 체취’
‘고향의 맛’과 함께,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향 같았다. 391년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만주벌판 삼천리’에
고구려의 땅을 넓힌 광개토대왕. 부왕(父王)이 죽은 지 2년 만인 424년,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6.39m 높이의
거대 석비(石碑)인 광개토왕비.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 만주벌에 아로새겨놓은 수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거기 있었으니
오죽하랴. 중국은 이 만주벌판에 있는 한민족의 역사를 “중국 변방의 역사”로 규정, 중국사로 편입시킨 뒤 오불관언이다.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고구려사 왜곡 시정 요구에 “중앙에선 모르는 일”이라고 오리발 내밀었다. 대국주의에 물든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극치다.
지난해 중국이 한국 수출품의 20%를 사줬고, 우리나라에 13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안겨준 것을 ‘지렛대’ 삼아 중국의 리더들은 “너희들이
어쩌랴”라고 배짱 퉁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국은 2004년 8월, 한국을 향해 중대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또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일본 최고지도자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흔들고, 중국 지도자들은 고구려사 왜곡카드를 흔드는 등 우린 중·일의 동시 압박에 새우등 터지는 형국에
처한 셈이다. 냉혹하고 차가운 대응과 국가적 장기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4월 17대 초선 국회의원 55%가 미국(45%)보다 중국이
‘가장 중요한 나라’라고 외쳤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현실인식이 과연 옳았던가 되새김질 해봐야 한다. “미국보다 중국 우선”이라고 답한 집권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63%도 자신들의 생각이 너무 나이브하지 않았나 반추해 봐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 내에서 ‘탈미친중(脫美親中)’을 외쳤던
힘있는 자들, 또 386 실세들, 이들의 반성이 중국대책의 첫 출발점이다. 그리고 동북아의 외교적 균형점이 무너졌을 때 장차 한반도에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를 냉정하게 진단해야 한다. 이 문제엔 여와 야도, 친노·반노도, 너와 나도 없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문제마저 편이 갈리면
한반도 주변엔 100년 전 쓰라린 악몽의 먹장구름이 걷히지 않을 것이다.
(주간조선 / 김민배 편집장 200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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